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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나무 Aug 04. 2017

곧바로 실전 투입

일상이 게임입니다

  지지학교 부모님께

  이틀에 걸쳐 쓴 지난주 리포트를 다시 읽어봅니다. 아무 개요 없이 떠오르는 대로 썼는데 무려 A4 7쪽이나 됩니다. “스압주의”라고 들어보셨나요? “스크롤 압박에 주의하세요”의 준말인데, 페이지가 많아서 읽으려면 페이지를 스크롤다운(아래로 내리기) 해야 하는데, 스크롤할 페이지가 많으면 읽는 이에게 압박을 준다는 뜻입니다. 일종의 민폐를 뜻하는 것으로 사과의 의미도 들어있습니다.

  지난주 리포트는 다시 읽어보니 2~3시간 강의 요목으로 손색이 없네요. 그리고 당사자 부모에게 의미 있는 리포트가 됐을 것이라 봅니다. 참고할 책이 있습니다. 우치다 타츠루가 쓰고 민들레에서 출판한 『하류지향』입니다. 우치다 선생은 일본의 양심적 문필가라는 평가를 받는데, 제가 2012년도에 직접 고베 집으로 방문해서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후 매해 한국에 와서 강연회를 열고 있고, 2013년부터 저서가 폭발적으로 줄줄이 번역 출간되고 있습니다.

  『하류지향』은 제가 우치다 선생을 찾아가게 만든 책입니다. 일본 사회를 5~10년 후 좇아가고 있는 한국에서 현재 우리 아이들 모습의 원인을 가늠하게 하는 혜안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일정 부분 우치다 선생과 다른 생각입니다. 한국 아이들은 한국만의 환경이 작용하고 있거든요. 기회가 있으면 얘기하기로 하고.....

  스압 주의를 꺼낸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온라인 소통이 고도로 발달하면서 긴 글은 민폐라는 정서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습니다. 어릴수록 더욱 심합니다. 어린이 청소년의 경우 스크롤다운할 만큼 글이 길면 읽지 않습니다. 단순 문맹은 거의 없는 한국이지만 문해맹(실제로 글을 읽고 이해하는 독해력이 바닥인 경우)은 OECD 국가에서 가장 높은 나라가 한국입니다. 매우 심각한 일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그대로 방치된다면 문해맹 비율을 더욱 높이는데 일조할 것입니다. (문해맹 통계는 성인의 경우입니다) 

  글을 읽고 속뜻을 파악하며, 내 생각을 글로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지지학교의 목표도 여기에 있습니다. 다만 읽고 쓰기 위해 읽고 쓰는 반복적 훈련이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읽고 쓰는 것은 듣고 말하기가 선행돼야 합니다. 듣고 말하기는 인간의 타고난 능력의 문제이지만 읽고 쓰는 것은 문자를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문자로 소통하기 시작한 것은 길게 잡아야 2천 년 정도입니다. 유럽의 경우 본격적인 문자소통은 인쇄술이 발달한 이후 300년 정도이고 한국의 경우에는.... 놀라지 마십시오. 70여 년 전 해방 당시 우리 문맹률은 90%입니다. 1945년에 10명 중 한 명만이 한글을 읽고 쓸 수 있었습니다.

  인류문명은 비문자 사회에서 진화해왔습니다. 문자 없이 룰을 정하고 거대한 건축물을 짓고 다음 세대 교육을 해왔습니다. 물론 현재는 철저히 문자 사회입니다. 문자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자 사회의 효율성은 비문자 사회의 전통이 없었다면 불가능합니다.(역사가 아닌 전통이라고 쓴 것은 역사 자체가 문자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인류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략 10만 년 세월이 아이들 10년 생애에 녹아 있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이 퇴행의 모습을 보이면서 보통의 상식적(선입견적) 발달보다 늦기 때문에 현재 신석기에서 청동기 시대로 넘어오는 시기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아직 문자시대는 도래하지 않았지만 고대국가 형태의 룰이 확립되고, 권력이 한 곳으로 집중되며 ‘우리’ 집단이 ‘남’ 집단과 경쟁하는 시기인 것입니다. 신석기의 빗살무늬토기와 달리 바닥을 평평하게 만들고 높은 온도의 불에 구워내는 민무늬토기를 만들어내는 시기의 교육은 어떠했을까요?

  한마디로 하면 “곧바로 실전 투입”입니다. 별도의 훈련시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노동현장에서 부모나 이웃과 함께 ‘일’을 하면서 룰을 익히는 겁니다.(19세기 초 영국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6세 아이의 공장 노동을 볼 수 있잖아요) 지난주 리포트에 언급한 가격 책정에 의한 교환이 아니라 대가 없는 노동입니다. 아이들은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됩니다. 위험에서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아이들 자신이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신석기에서 청동기로 넘어오는 시기에 있다고 했을 때 강조되는 의미는 언어의 학습에 있습니다. 아이들이 존재가 수천 년 전에 있는 것이 아니고 21세기에 있지만 청동기로 넘어가려는 시기에 있다고 말하는 함의는 언어의 습득이 “곧바로 실전 투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우리 아이들이 읽고 쓰는 것을 능숙하게 하려면 반드시 듣고 말하기가 능숙해야 하는데, 그것은 별도의 학습과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룰을 익히는 방법만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폐쇄된 공간(교실)에서 국어시간에 듣고 말하기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듣고 말하기의 연습은 훈련 없이 실전에 투입되는 것입니다. 룰이 뭔지 전혀 모르고 룰이 적용된 옥타곤에 오르는 격투기 선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종격투기에서 선수는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선 안 되고, 두 손을 바닥에 댄 선수를 발로 차서는 안 된다는 룰이 있습니다. 룰을 어기면 경고를 받고, 그래도 어기면 벌점을 받거나 실격패합니다.

  지지학교에서 제게 경고를 듣고 잔소리를 듣고 벌을 받는 일이 자연스러운 공부 과정입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은 심판일 뿐이고 랭귀지 파트너는 또래집단의 동료입니다. 듣고 말하기에서 필수적인 구성요소가 또래집단 랭귀지 파트너인데, 우리 아이들이 그동안 함께 할 동료 없이 지내온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일  상의 복원이,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코드(또는 초점)입니다. 지지 아이들은 주중 일상은 기숙 형태로 학교에 머물기 때문에 학교와 선생이 일상을 책임집니다. 주말에 아이들이 집에서 부모와 함께 지낼 때 일상은 어떨까요. 교사로서는 알 수 없는 시간입니다.

  오해할 수 있는 점은 일상의 복원이 어떤 특별한 프로그램을 말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일상은 그야말로 일상(日常)입니다. 이상(異狀)한 생활이 아니라 평범한 보통의 시간을 말합니다. 어쩌면 이상(理想)적 추구도 경계할 일입니다. 따라서 특별한 놀이터, 별난 음식, 탐나는 선물, 과도한 허용은 모두 일상과 거리가 멉니다. 교사가 심판이라면 부모도 당연히 심판의 역할을 해야 하고 잘못에 대해 경고와 페널티 부여가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일상의 복원은 무엇을 복원한다는 말일까요. 그것은 말(언어)의 복원입니다. 말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파트너가 있어야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듣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집에서 듣기 말하기 과정에서 부모가 파트너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부모는 심판 자격이 있는 플레이어입니다. 이때 아이는 게임의 룰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봐야 합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룰을 모르는 플레이어를 인정하는 것!

  게임은 별도의 훈련시간이 아니라 일상을 말합니다. 아이는 주말과 휴일에 집에서 부모 및 가족과 지낼 때 일상에 바로 투입돼야 합니다. 즉 아이는 부엌에서 음식을 조리하며 게임에 참가해야 합니다. 아이는 화장실 청소하며 게임에 참가해야 합니다. 아이는 쓰레기 분리수거에 참가하여 게임을 즐겨야 합니다. 마트에서 카트를 밀면서 게임에 참가해야 합니다. 이런 모든 게임은 다른 플레이어와 대화하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만듭니다. 부모와 대화가 필요할 때 테이블에 마주 앉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아이에게 임무를 주어야 합니다.

  게임에 참가하지 않는다면(처음엔 참가하지 않으려 할 가능성이 크겠지요) 끼니를 주지 마세요. 페널티를 음식 제공하지 않는 것으로 합니다. 채근과 꾸중으로 하지 말고요. 우리 아이들이 두려워하는 벌입니다.(학교에서는 무조건 끼니 제공합니다^^)

  게임에 임하는 부모님 플레이어를 응원합니다. 승리하십시오. 승리는 아이에 대한 승리가 아니라 일상의 복원에 성공하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한국의 어린이 청소년들이 얼마나 일상에서 벗어나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일상의 게임에서 배제된 아이들은 컴퓨터와 스마트폰 게임밖에 할 줄 모릅니다. (2016.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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