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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나무 Aug 06. 2017

시간과 전쟁

20년 전 조디 포스터 주연 영화 <콘택트>

  딸아이가 올 초 개봉한 영화 <컨택트;원제 Arrival>를 언급하길래(영화 속에 교묘하게 녹아있는 성차별, 국가주의, 미국의 우월성 등) 지난주에 ipTV로 봤습니다. 영화 초반에 뱅크스 교수(언어학자)로 나오는 에이미 애덤스의 대사에 끌려 SF영화가 아닌 교육적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로 감상했습니다. 초반 빨려들 듯 시청하다가 용두사미 꼴이 돼서 아쉬움이 있었지만 나름 원작 소설(네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著)과 감독이 전하는 평화 메시지가 좋았습니다.

  영화 초반에 주인공 뱅크스 교수는 국가안보위원회 간부에게 말합니다.

  "산스크리트어로 전쟁이 뭔지 물어보세요. 그리고 그 뜻이 뭔지도."

  다시 돌아온 간부로부터 다른 대학 교수가 한 말을 전해 듣습니다.

  "가비스 티.... 다툼이라고 하더군요."

  그 말은 들은 뱅크스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더 많은 암소를 원한다."

  고대 산스크리트어가 전쟁의 개념적 어원을 '소유의 확대'로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전쟁의 종식을 위한 키워드를 영화가 제공하겠다는 의도로 읽었습니다. 그러나 몰입 시청을 못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내가 상상한 키워드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딱 20년 전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이 만든 <콘택트>를 재발견했습니다. 저메키스 감독은 1995년에 <포레스트 검프>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미국인입니다. <콘택트>는 1985년 발표한 칼 세이건의 SF소설이 원작이라 기회가 되면 보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잊고 있었습니다. 일요일 아침 할 일은 산더미지만 멍청한 정신을 깨 보려고 조디 포스터 주연의 <콘택트>를 봤습니다. 아주 재밌게 봤습니다. 20년 전 세상의 질서와 당시 지구 지식인의 고민이 잘 녹아있더군요.

  20년 전 전 가족을 떠나(아내의 표현으로는 “버리고”)강원도로 훌쩍 떠난 열혈 현장교사였습니다. 단지 20년이지만-영화에서 1초의 지구 시간이 웜홀 저편의 베가 성에서는 18시간이었다는 묘사처럼-100년 이상의 변화를 느낍니다.

  오늘도 영화를 보며 무릎을 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웜홀 이쪽과 웜홀 저쪽의 차이가 시간의 흐름에 있는 것처럼 1997년과 2017년은 시간이 다르게 흐릅니다. 시간은 숙주 인간이 없다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것은 20세기 인간과 21세기 인간에게 시간이 다르게 통과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 1997년에 머물고 있고, 제 시간은 1997년의 시간 방식으로 흐릅니다. 제가 만나는 아이들은 2007년~2008년 생인데, 이 아이들에게 흐르는 시간은 전혀 다릅니다.

  조디 포스터가 맡은 천문학자 앨리는 웜홀을 통해 베가 성에 다녀오지만 그를 증명하라는 정부 관료의 요구에 아무런 증거를 내밀지 못합니다. 오직 앨리의 기억에서만 생생한 외계 생물체가 존재할 뿐인 것이죠.

  마찬가지로 나는 아이들에게, 아이들은 내게 서로 다른 시간의 흐름에 대해 증명하라는 요구를 하지만 나도 아이들도 증거를 내밀 수 없습니다. 이 엄청난 시간과 인식의 간극을 극복할 방법이 아직 없습니다. 칼 세이건은 인간이 점차 해결해 나갈 것이니 너무 초조해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하지만 전 매우 초조합니다.

  선생인 저는 아이들을 관통하는 시간의 흐름이 왜곡된 것이라고 끝없이 얘기합니다. 만약 너희의 시간을 교사이자 어른인 내 시간의 흐름에 맞게 연동하면 밝은 미래가 있을 것이라 주입합니다. 

지난 10년의 제도 밖 선생 노릇은 이 말을 무한 반복한 세월이었습니다.


 제 입장에 나의 시간은 선형(Linear; 과거-현재-미래의 순서가 확실한)이지만 아이들의 시간은 비선형(Non-Linear;시간의 흐름이 랜덤으로 뒤섞인)이라고 봅니다. 방법은 두 가지인데, 제가 비선형으로 들어가든가 아이들이 선형으로 넘어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도저히 내가 비선형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콘택트>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베가 성으로 향하는 우주선에 오르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결국 대부분 사람들은 탑승을 거부하고 조디 포스터만 올라타는 것처럼 수많은 네트워크에 걸린 “내”가 비선형으로 들어가는 것은 세상과 단절을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라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아이들도 그런 것 같습니다. 선형의 세계로 넘어오는 것은 아이들 입장에서는 베가 성으로 떠나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아이를 마취시켜서 강제로 우주선에 태울 수 있겠지요. 우주선 의자에 꽁꽁 묶어서 탈출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의 시간은 선형의 세계로 넘어올까요?

  밖에서 강연을 하거나 부모 상담을 할 때 일터와 삶터의 분리가 오늘의 문제를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농경사회에서 일터는 집 근처에 있었으니 사는 곳과 일하는 곳이 함께 있어서 부모 자식 간 관계가 안정적이지만 오늘날은 일터로 떠난 부모는 한시적으로(퇴근해서 돌아올 때까지) 남과 같은 관계가 되기 때문에 아이들의 소외를 불러온다는 설명을 주로 했습니다. 아이들의 소외는 발달지연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안정적이며 항상(恒常)의 ‘home'을 구성해야 한다고 조언했던 것입니다.

  일터와 삶터의 구분 문제는 같은 시간의 흐름을 전제로 합니다. 이제는 시간이 따로따로 흐르기 때문에 엄마가 늘 집에서 아이를 돌본다고 해도 갈등은 필연적입니다. 과거의 결과로 현재가 구성되며,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엄마와, 시간의 흐름은 알 수 없는 법칙으로 뒤섞여 흐르며 과거의 축적된 결과물로 미래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아이가 중도에서 합의할 수 있을까요.

  지금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비선형의 아이들 세계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 아이의 시간이 나와 다르게 흐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애매모호한 시간 타령의 현실태는 ‘성실’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의 문제로 나타납니다. 

  성실해야 한다는 주장과 성실은 결과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주장의 충돌은 21세기 세대 전쟁입니다. 쌍방의 피해가 심각하지만 아이들이 더 많은 피를 흘립니다. 더 많이 죽어가는 것은 아이들입니다. 아이는 어른 없이 살 수 없는데 어른은 아이 없이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전쟁 수행 중인 군인의 입장이자 심정입니다. 하지만 처음엔 제가 심판인 줄 착각했습니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거나 그만두거나.... 어쨌든 종식을 원합니다.

No War!!!! (2017.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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