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뒷모습 > 미셀 투르니에 글, 에두아르 부바 사진, 김화영 옮김
오늘도 거울 앞에 섰다. 옷매무새도 다듬고 얼굴의 이쪽저쪽을 살핀다. 그리고, 눈을 부릅떠 보기도 하고 미소 짓기도 해 본다. 외출 전 나의 루틴이다. 한 가지가 더 있다면 마스크를 쓴 후 한 번 더 살펴보는 것이다. 그런데, 뒷모습은…….
지금은 서재 한편에 장식으로 놓여 있는 구형 필름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어대던 시절이 있었다. 사진 찍기에 몰두하던 시절 구입한 책 중에서 아직까지도 소중하게 간직한 책 한 권이 있다. 에두아르 부바의 사진과 내가 좋아하는 작가 미셀 투르니에의 글이 담긴 <뒷모습>이다. 이 책의 역자는 김화영 교수다. 에두아르 부바, 미셸 투르니에 그리고 김화영, 무슨 긴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남자든 여자든 사람은 자신의 얼굴로 표정을 짓고 손짓을 하고 몸짓과 발걸음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그렇다면 그 이면은? 뒤쪽은? 등 뒤는?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뒤쪽이 진실이다!
<뒷모습>은 에두아르 부바가 삶의 이면을 드러내 보인 53장의 사진과 각 사진에 덧붙여진 미셸 투르니에의 주석은 투르니에의 산문집의 제목이기도 한 ‘짧은 글 긴 침묵’의 여운을 준다.
사진의 매력은 낯익은 세상을 담고 있으면서도 낯익은 세상을 낯설게 한다는 점이다. 어느 한 곳의 한 시점을 담은 사진 한 장은 영원한 세상의 한 단면을 보여줌으로 기억과 상상을 통해 그때 그 장소로 다시 돌아가게 해주는 매력이 있다. 사진 속의 ‘나’의 뒷모습은 의도되었다기보다는 우연히 포착된 또 다른 ‘나’의 한 단면이다. 그리고 그 뒷모습은 우리가 미쳐보지 못한 또 다른 세상보기를 보여준다.
에두아르 부바의 사진은 다양한 뒷모습을 보여준다. 앙상한 두 마리의 소를 끌고 가는 농부의 뒷모습은 소와 닮아있고 어깨에 짊어진 쟁기는 십자가의 형벌 도구와 같다.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지고 가는 농부의 고단한 삶이 뒷모습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바닷가 바위 그늘 아래 화려한 옷을 입은 화가가 바다를 배경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우리는 그림을 그리는 그를 보는 동시에 그가 그리는 바다를 함께 바라본다. 방파제에서 바다를 보는 여자와 그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뒷모습, 때론 침묵이 서로의 마음을 더 잘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굽은 허리를 지팡이로 지탱하며 길을 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은 애잔하다. 젊은 시절 꼿꼿한 자세로 경쾌하게 걸으며 앞을 걸었을 할머니는 ‘땅바닥에 떨어뜨린 젊은 날’을 줍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인지’ 허리를 굽혀 지팡이에 의지하며 걷고 있다. 옆구리 낀 회양목 가지가 인생의 무상이 느껴진다.
어른들은 대체 무얼 보고 있기에 저리도 심각한 것일까? 그 무슨 세속적인 구경거리에 그토록 절박하게 붙잡혀 있기에 그들은 오직 하나뿐인 중요한 것을, 잊히고 무시당하고 버림받은 저 어린 천사를 보지 못하는 것일까? 뒤에서 기다리는 천사에게 등을 둘린 채 우리는 몇 번이나 어리석은 즐거움을 찾아 무작정 달려가기만 했던가?
우리는 경주마가 앞만 보고 질주하도록 눈가리개(차안대)를 씌우듯 극단적인 효율성을 강요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 속에서 삶은 시간 단위로 쪼개지고 존재보다는 변화가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짧은 점심시간을 마치고 일터로 돌아가기 전에 공원 벤치에 앉아 햇살을 받으며 책 한 권을 옆에 두고 벤치 등받이에 팔을 축 늘어뜨린 중년 신사의 뒷모습은 ‘나’의 모습이기도 하고 또한, ‘너’의 모습이기도 하다.
상념도 한순간, 시간에 쫓겨 바삐 일어나는 순간 역자 김화영 교수의 글이 가슴에 담긴다.
사진 속의 이 다양한 뒷모습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다시 살아 움직이는 삶의 앞모습을 만나면 즐겁다. 그러나 그 즐거움의 배경에 오래 지워지지 않는 뒷모습들이 더러 있다. 이것이 바로 미적 균형이 아닐까. 에두아르 부바와 미셸 투르니에의 ’ 뒷모습‘에는 우리의 눈높이를 올려주는 그 같은 미적 균형이 있다.
오늘은 작은 거울을 손에 들고 뒷모습을 살핀다. 외출 전 루틴을 바꿔본다. 이쪽저쪽 거울을 움직여 내가 모르는 ‘나’, 있는 그대로 진심의 ‘나’가 드러나는 곳을 살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