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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길재 Feb 06. 2022

작가 권해일 <사진전>을 관람하고

- <Modern House, Compressor> 에 대한 소고 -

사회는 역사가 필요하다. 역사는 우리 삶의 부조(浮彫)에 깊이를 부여하고, 그 깊이는 사회의 울림통이 된다. 형성된 것은 그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앎으로써 현재의 모습으로 인식된다. 인간은 세 가지 시간 공간, 즉 과거와 현재, 미래의 주민이다. 그런 점에서 지나간 것은 죽지 않는다.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쨌든 인간의 머릿속에 계속 살아 있는 동안은. 미래도 결코 그 자체로 약속이 아니라, 항상 현재의 근심을 완화시켜 준다는 측면에서 현재의 지평 속에서만 존재한다.  -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친숙하고 가까울수록 그 존재 가치를 잊거나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한 발짝 물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 속엔 우리 삶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최근 광주 신축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붕괴사고가 있었다. 신축 중인 고층아파트가 붕괴되는 현장은 우리나라에서 보기드문 일이라 그 충격은 크다. 나지막한 주변 건물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흉칙한 고층아파트가 주는 중압감과 외경은 기 드보르(Guy Debord, 1931-1994)의 ‘도시의 모습을 계획하는 것은 소비’라는 비판의 전형적인 예이다. 무너진 아파트의 드러난 철골과 부서져 내린 콘크리트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의 종착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작가 권해일은 후배이자 친구이며 동료이다. 적지 않은 세월을 공유하며 그의 삶을 관통하는 철학을 조금 이해하는 수준까지 되었다. 그의 최근 작품들은 비전문가인 일반인이 선호하는 풍경이나 자연과는 동떨어져 있다. 전형적 도회지 댄디풍의 작가는 의외로 본인 말에 따르면 ‘깡촌’ 출신이다. 그에게 도시에서의 생활은 호기심과 경외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기 드보르의 말처럼 ‘도시환경의 자기파괴의 시기’에 접어든 대도시에서 주거문화는 이전과는 다르다. 그가 보는 세상, 도시는 어떤 모습일까?

 

산업화시대에 2층 양옥집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모두가 부족했기에 바람도 소박했고 작은 것에 만족하고 즐거웠던 어린 시절, 단칸방에서 벗어나 부모님의 손을 잡고 2층 양옥집 전세로 이사 가던 그 날의 기억은 여전히 나의 마음 한 구속 깊이 새겨져 있다. 차가운 시멘트와 벽돌로 지어진 양옥집은 철문과 단단한 블록담으로 둘러싼 성(城)과 같았지만, 여전히 서민들에게 있어 가족의 안식처로써 삶의 역사가 축척된 공간이었다. 또한, 양옥집은 비슷한 집들로 이어진 골목을 통해 성(城)이 갖는 폐쇄성과 단절성을 극복하고 이웃과 희노애락을 공유하는 소위 '골목문화'를 만들어냈다.


이후 산업화시대에서 정보화시대로 이어지고, 아파트가 새로운 주거공간으로 대두되면서 삶의 애환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나지막한 집들과 골목 등은 재개발의 대상이 되었다.  재개발 대상이 된 곳의 집들과 골목은 삶의 역사가 아닌 없어져야 할 천덕꾸러기가 되었고, 그곳의 정주민들은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집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떠난 그 자리엔 도심 속 성을 쌓듯이 더 높고 긴 담과 함께 주변 경관과는 조화되지 않은 콘크리트 덩어리가 세워졌다. 그리고, 이제 집의 가치는 삶의 공간을 넘어 '어느 순간 언제 옮겨야 돈이 되는지'를 따지는 재산으로, 타자와의 관계성보다는 사생활의 보호와 주변과의 단절성으로 결정되어진다. 그래서, 아파트는 비쌀수록 더 높은 담장을 세우고 복잡한 접근절차를 통해 외부와의 단절을 강조한다. 또한, 브랜드 네임 즉,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운다.


기 드보르는 그의 저서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현대적 생산조건들이 지배하는 모든 사회들에서, 삶 전체는 스펙터클의 거대한 축적물로 나타난다. 직접적으로 삶에 속했던 모든 것은 표상으로 물러난다.’고 하였다. 그로 부터 5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삶은 그가 말한 것처럼 이미지 정도로 취급되고 우리의 삶과 행동들은 단면의 여러 이미지로 압축되어 통용되고 있다.


권해일의 사진은 아파트라는 새로운 한국적 주거형태의 건축과정을 사진으로 보여준다. 그의 사진은 아파트라는 스펙터클 속에 숨겨진 또 다른 스펙터클, 즉 복잡하게 얽힌 철골구조, 다양한 형태의 거푸집, 작업장에 그려놓은 다양한 기호들, 현장작업자들, 각종 자재, 복잡한 비계와 공사현장을 보이지 않으려는 장막들 등을 가감없이 드러내 보인다. 아파트라는 건축물은 우리의 머릿속에 '아파트'라는 이미지가 압축되어 통용되고 있지만, 사실은 복잡한 각 단계별 역할의 충실성에 따른 사회적 관계 속에서 완성되어짐을 보여준다. 그리고, 최근의 붕괴사고와 같이 각각의 관계성이 각자의 역할에 대한 신뢰와 행위를 전제하지 않는 한 철옹성 같은 콘크리트 덩어리도 언제든 무너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작가 권해일이 완성된 결과물이 아닌 건축과정을 관심을 두는 이유는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압축된 이미지, 즉 단면에 따른 관계맺기보다는 그 이면에 담긴 본질에 따른 관계맺기를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그의 사진을 보면서 '후배이자 친구이자 동료인' 작가 권해일이 앞으로 추구하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분명한 것은 그의 사진에는 삶이 있고 역사가 있을거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무심하게 놓치는 그 현장에 그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 본 브런치에 게재한 사진은 작가로부터 사전 허락을 받았습니다. 혹시 사진을 활용할 경우 반드시 작가로부터 사전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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