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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이 Nov 27. 2019

넌 포도였고, 난 콩이지만, 우리는 초록이야

가수 설리가 나에게 은유하는 것은



어느 날, 아기가 오렌지 주스 옆에 놓인 두유달라고 했다. 두유는 한 번도 먹여본 적이 없었다. 컵에 따라주니 입만 한번 대보고는 더 먹지 않았다.



"포도?"



아기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작은 손가락은 두유 겉면에 그려진 초록색 콩을 가리키고 있었다.



"포도 아니야. 이거 콩이야."



그제야 아기가 왜 갑자기 두유를 먹겠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오렌지 주스 옆에 있으니, 당연히 청포도 주스로 보였겠지. 콩의 동글동글한 모양은 초록색 청포도 알갱이 닮았으니까. 포도의 달콤하고 상큼한 맛을 기대하고 입에 머금었는데, 콩의 텁텁한 맛이 느껴지니, 얼마나 실망스러웠을까?



"이게 포도 같았어? 아닌데~ 콩인데."



놀리는 말투에 아기도 제 실수를 알고 있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반응이 귀여워 나는 같은 질문을 연거푸 했다. 때로 아기가 포도라고 하면 콩이라고 우기고, 콩이라고 하면 포도라고 우기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아기는 엄마가 왜 그런 농담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 이후, 아기는 포도나 콩 그림을 보면 더 오래, 더 관심 있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닮은 대상은 한참 들여다보 버릇 나에게도 있었다. 어떤 사물, 사람, 사건이 기존에 알고 있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 때마다 놀랍게 빠져 들었다. 감춰진 비밀의 단서 한 자락을 발견 기분이 때문이었다.



'왜 같은데, 다르지? 왜 다른데, 같지?'



우연한 기회로 생긴 유사성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하늘이 바다와 같은 빛을 띠는 순간은 분명한 이유가 있 것 같았다. 사람은 수많은 은유로 가득한 세상에 수수께끼를 풀 운명으로 던져진 게 아닐까? 바다, 하늘, 비, 구름이 있는 이 세상이 다른 것의 메타포냐고 물었던 영화 <일 포스티노>의 우체부처럼, 시인이 되기도 전에 이미 시인이었던 그처럼 말이다.



닮은 사람을 발견할 때도 그랬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선후는 상관없었다. 나는 너의 비유이거나, 너는 나의 비유였다. 상대에게서 자신과 같은 점을 하나 찾아냈을 때, 사이다의 탄산이 터지는 것처럼 명쾌한 해석 하나가 얻어졌다. 그 순간은 '공감'이라는 다른 말로 치환할 수 있었다. 공감은 너와 나의 차이를 이해하는 작은 실마리였다. 우리 근본 어느 정도 같은 점이 있다고 전제한다면, 우리 왜 다른 길을 가게 되었는지 설명할 수 있었다. 우리는 왜 다른 표정을 하고, 왜 다른 말을 하고 있는지까지도.



자전적 소설이나 일인칭 에세이에 매료되 이유도 다르지 않았다. 글 속에 살아 숨 쉬는 누군가가 나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면, 더 오래 읽고, 더 많은 구절을 필사하고, 더 깊이 음미하게 되었다. 책을 읽고 있으면 외롭지가 않은 이유가 그거였다. 작가가 내 마음을 알아주고, 대신 설명해주기 때문이었다. 문득,  글도 누군가를 덜 고독하는 글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이 투명하게 겹쳐지지 않는다 해도, 누군가의 삶에 작은 은유가 되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우연히 <악플의 밤>이라는 TV 프로그램을 보았다. 1회다. 세상을 떠났다고는 믿기지 않는 한 여성 MC가 소녀 같은 표정으로 활짝 웃고 있었다. 가수 설리였다. 그녀는 상큼한 포도였고, 나는 텁텁한 콩인데도 볼수록 비슷하게 느껴져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하지만 포도와 콩이 같다는 사실을 발견한 아기처럼 까르르 웃 못했다. 잃어버린 영혼이 아까워 계속 눈물만 났다.



그녀는 자신이 관종이라며, 너희들도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했다. 수많은 악플에도 숨지 않았던 이유는 편견과 틀을 깨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별거라고 생각했던 모든 이에게 사실은 별거 아니라고, 소신 있게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본인을 어떻게 봐줬으면 좋겠어요?"



"그냥 조금 그냥 이런 사람도 있다? 그리고 저를 보면, 사실 재미있지 않을까요?"



세상에 재미있는 사람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그녀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유쾌함을 가장한 모양새도 사실, 생애를 건 투쟁이었던 거다. 방송을 다 본 뒤, 나도 초록빛이 나는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또 다른 포도가 내 글을 읽는다면, 자신과 같은 초록이 있음을 느낄지 모르니까. 그러면 조금 위로가 될지도 모르니까. 또, 자신이 초록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사람도 자신의 무지개색 스펙트럼 안에 초록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오늘은 노브라로 외출하기로 했다. 아니, 브라를 벗고, 대신 그녀가 준 자유를 입기로 했다. 그녀는 없지만, 바다 위를 왔다 갔다 하며 배를 이리저리로 튕기는 단어들처럼 그녀의 메시지는 여전히 살아있을 수 있었다. 은유는 그렇게 또 다른 행동이 되어 움직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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