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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이 May 28. 2019

나를 닮은 딸을 낳는다는 것

누군가의 다행스러움이 되기 위해 태어나다


나는 심한 곱슬머리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주로 흑인에게서 볼 수 있는 심하게 꼬불거리는 머리. 힘없이 잘 끊어져서 평생 길러도 어깨선 이상을 기를 수 없는 머리. 독한 파마약과 고데기를 쓰면 손상이 더 심해져 스트레이트 파마도 할 수 없는 머리.       



나는 앞머리를 이마 아래로 내린 적이 없었다. 온 머리를 하나로 모아 공처럼 똘똘 말아 묶는 게 전부였다. 어릴 때, 나를 처음 본 친구들은 "너는 왜 앞머리가 없어?"라고 물었다. 그런 질문을 하는 친구의 이마 위엔 하나같이 앞머리가 있었다. 평소에는 정갈하게 내려앉아 있다가, 머리가 움직이면 가볍게 찰랑거리는 머리. 쇠 수세미처럼 얽혀 머리를 아무리 흔들어도 미동도 하지 않는 내 머리와는 정말 다르던 그 머리.      



“너는 머리가 왜 그래?”라는 말을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한 건 초등학생 때부터였다. 라면, 배추, 폭탄이라는 놀림도 받았다. 심한 괴롭힘을 당한 적은 없지만, 견디기 힘든 시선은 꽤 있었다. 날 보며 수군거리며 낄낄거리는 소리에 뒤통수가 뜨거웠던 적도 많았다. 언젠가부터 뒤에서 웃음소리만 나도 몸이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내 머리를 보고 비웃는 소리인가 싶어서였다.      



성인이 되어, 세상엔 다양한 모습의 사람이 존재함을 알게 된 이후에도. 인간관계에서 외면보다는 내면이 더 중요하다는 소위 어른다운 ‘쿨’함 속에서도. 여전히 목에 걸린 가시가 있었다. 그걸 들킬까 봐 지나치게 명랑한 척한 날도 많았다.      



아기를 낳기 위해 하반신 마취를 하고 수술대에 누웠을 때, 아기가 나를 닮을 가능성을 처음으로 떠올렸던 것 같다. 출산 직전까지 외면했던 생각이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죽여 울던 한 어린아이와 왜 나만 이런 모습으로 태어났냐고 소리 없이 외치던 숱한 밤이 생각났다. 로또 당첨 번호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아기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간절히, 간절히 나를 닮지 않길 바랐다.      



다리 밑에서 "응애"하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나고, 의사는 수술보에 감싼 아기를 내 눈앞에 내밀었다. 나는 냉큼 머리카락 상태부터 살폈다. 하얀 태지에 뒤덮인 아기의 젖은 머리카락. 아기는 곱슬머리가 아니었다. 다행이었다. 순식간에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안도감이 밀려왔다.      



아기는 남편을 닮아 머리가 까맣고 곧았다. 배냇머리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굵기도 굵고 숱도 많았다. 머리를 길게 길러 예쁘게 늘어뜨릴 수도 있겠구나. 꼼꼼하고 정성스레 땋아 내릴 수도 있겠구나. 앞머리를 짧게 자르거나 단발머리를 하거나, 염색도 할 수 있겠구나.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모두 내가 못 해본 것들이라서. 자기 존재를 부정하고도 행복할 수 있는 순간이 있다면 그건 나의 못난 점을 닮지 않은 자식을 바라볼 때가 아닐까.



갑자기 아빠가 보고 싶어졌다.    







 

우리 아빠는 키가 작았다. 태어날 때부터 작진 않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자라는 속도가 남을 못 따라갔다. 명문 상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입사 면접에서 번번이 낙방이었다. 고교 동창들이 회사 간부나 은행 지점장이 되는 탄탄대로를 달려갈 때, 아빠는 미싱 기술을 배워 그 기술로 평생 밥벌이를 하셨다.


어릴 때, 엄마 손 잡고 가던 아빠 공장은 서울 을지로에 있었다. 여러 대의 미싱에서 나는 소리, 기름 냄새, 알록달록한 실패와 옷더미가 담긴 바구니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아빠가 페달을 밟으며 손으로 천을 밀어내면, 미싱 바늘은 빨리 감기 버튼을 누른 것처럼 위아래로 바쁘게 움직이며 수를 놓았다. 홀린 듯 한참을 쳐다보게 되는 볼거리였다. 그렇게 아빠는 온종일 아동복에 곰을 그렸고, 한복에 꽃을 그렸고, 작업복에 이름을 썼다. 어린 내 눈에 아빠는 커다란 공장의 사장님이었다. 나에게 아빠는 항상 큰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빠도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을 모를 리 없었다. 내가 아기를 낳으며 곱슬머리가 아니길 바랐던 것처럼, 아빠도 내 키가 작지 않기를 바랐겠지. 다행히 나는 4kg의 우량아로 태어났고, 남들보다 성장 속도가 빨랐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 신입생 전원이 빼곡한 운동장에서도 가족들은 나를 대번에 찾았다. 엄마의 표현에 의하면, 나는 ‘다른 아이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크기’ 때문이었다. 내 키가 아빠 키를 앞지르는 날도 금세 찾아왔다. 자기가 겪은 고생이 자식의 생애에서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나를 나의 모양으로 태어나게 한 건지 몰랐다.      



식구 중에 가장 키 큰 사람이 나였기에, 형광등 전구 교체는 내 몫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능숙하지만, 처음에는 의자 위에서 까치발을 한 채 긴 전구를 소켓 위치에 맞추는 게 어찌나 어렵던지. 붙들 곳이 없는 허공에서 균형을 잃고 몇 번씩이나 휘청거렸다. 그때마다 아빠는 의자를 붙들고 날 올려다보셨다. 의자를 붙들어 주는 게 큰 도움이 되진 않았지만, 당시 아빠는 뭐라도 해야 했다. 내게 미안하고, 또 고마웠을 테니까.      



그래도 아빠보다 딸이 더 크다는 게 수치가 아니라 자랑일 수 있는 이유는, 아마 내가 아빠의 딸이기 때문이었겠지. 곱슬머리이기 때문에, 예쁘지 않기 때문에, 평생 만족하지 못한 내 겉모습이 누군가에게는 최고의 만족이었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나는 부모님에게 타고난 긍정의 존재였다.      





그러고 보면 부모님은 곱슬머리를 참 귀여워해 주셨던 것 같다. “누굴 닮아서 요런 게 나왔을까?” 하시며 엄마는 머리를 땋기도 하고, 양 갈래로 틀어 올리기도 하며, 매일 귀엽게 꾸며 주셨다. 부모님은 누가 뭐래도 나를 세상에서 가장 예쁜 딸로 키우셨다. 그 이유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예쁜 딸이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낳아보고 알았다. 누가 뭐래도 자기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는 걸.      



나는 사실 두려웠다. 나를 닮은 아이를 낳는다는 게. 하지만 그 두려움에서 한 발 나아갈 수 있었던 건, 부모님이 주신 사랑의 토양, 자존감의 원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나여야 하는 이유는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그냥 부모님께 여쭤보면 될 일이었다.    


  

이런 생각도 해본다. 내 아이가 나를 닮았으면 어땠을까. 나를 닮아 곱슬머리였다면.      



나는 그 아이를 더 사랑해줄 것 같다. 마음의 허허로움을 알기에 더 사무치게 사랑해줄 것이다. 예쁘지 않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를 대신해 열 번, 백 번, 천 번이라도 예쁘다고 말해줬을 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덜 받은 몫이 있어 억울했다면, 아이에겐 예상되는 결핍 이상의 사랑을 넘치도록 채워줄 것이다.     


 

세상에 없는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을 닮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나를 닮은 게 손해가 아니라고 생각하도록. 나를 닮았기에 세상에 없는 사랑을 받을 특권을 갖게 된 거라고 느끼도록. 아마 내가 아빠나 엄마를 닮았어도 그분들은 나에게 그렇게 하셨을 것이다.      



모든 사랑의 무게는 잴 수 없지만,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사랑은 더욱 잴 수 없는 것 같다. 물을 흠뻑 머금은 솜처럼 무거울 테니까. 어쩔 수 없다. 세상엔 조금만 건드려도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 있는 거니까. 눈물이 나는 건 무언가 절실하다는 증거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엄마", "아빠"라는 말만 떠올려도 울컥해서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거다.     



만약, 태어난 게 눈물 나는 일처럼 여겨진다면, 그건 자신의 소중함을 더 선명하게 보기 위해, 눈물로 눈을 씻는 과정에 있어서다. 부모를 닮았든 닮지 않았든 우리는 모두 그렇게 누군가의 다행스러움이 되기 위해 태어난 것. 그렇게 흠뻑 젖듯이 사랑하며 살면 그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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