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가면 친정엄마 생각에 한 번은 울게 된다는데, 나에게 그 한 번은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에 찾아왔다.
서른넷, 늦은 결혼이었다. 언니가 시집을 간 이후에도 난 한참 동안 부모님과 붙어살았다. 그런데도 엄마는 내가 더 늦게 갈 줄 알았다고 했다. 언젠간 떠날 것을 알았지만, 최대한 미루고 싶었나 보다. 그에 비해 나는 묵은 짐을 정리하는 것처럼 홀가분했다. 결혼식장에 입장해 주례 선생님 앞에 섰을 때만 해도 내 마음은 간단하게 싼 여행 가방 같았다.
하지만 하객을 향해 돌아섰을 때, 결혼이라는 게 그리 가벼운 에피소드가 아님을 깨달았다. 부모님은 하늘이 무너진 듯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물이 쏟아질까 봐, 나와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웃었다. 철없는 신부처럼 방긋방긋 웃었다. 자잘한 감정 따윈 손에 든 부케 꽃의 화사함 뒤에 감춰 두었다. 덕분에 나는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행복하기만 한 신부로 남았다.
하지만 내게도 울 수밖에 없는 순간이 찾아왔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들어선 신혼집, 아직은 남의 집처럼 낯설고 적막한 그곳을 홀로 밝히고 있던 낯익은 하얀 도자기 그릇들 때문이었다. 원래는 친정집 찬장에 차곡차곡 쌓여있던 물건, 바로 엄마가 결혼할 때 혼수로 해 온 '한국 도자기' 세트였다.
한국 도자기 세트는 우리 집 보물이었다. 누구의 도움 없이 엄마 혼자 돈 벌어서 산 명품 중의 명품이었으니까. 공기, 대접, 소찬기, 대찬기, 소접시, 중접시, 대접시, 면기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다양하고, 개수도 많았다. 잡다한 무늬 없이 가장자리에 음각을 새긴 고상하고 단정한 그릇이었다.
엄마는 네 식구 살림에 필요한 밥공기 4개, 대접 4개, 접시 몇 개만 꺼내고, 나머지는 건드리지도 않았다. 어린 딸들이 놀다가 실수로 깰까 봐, 찬장 근처에서는 놀지도 못하게 했다. 그리고 엄마는 매일 사용한 그릇을 뽀득뽀득 닦았다. 설거지할 때는 접시 뒷면 틈새까지 꼼꼼히 닦아야 한다는 잔소리를 매번 늘어놓으면서.
하지만 같은 그릇을 계속 사용하다 보니, 도자기 그릇의 하얀 광채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엄마가 설거짓거리 앞에서 찌든 때를 벗기는 시간도 점점 길어졌다. 하지만 멀쩡한 그릇이 그냥 버려지는 법은 없었다. 이가 나간 그릇에조차 음식이 담기곤 했다.
"버려, 좀 버려! 그릇 많잖아! 저기도 천지가 다 그릇이잖아!"
나는 찬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용하지 않은 새 그릇들이 두꺼운 눈처럼 쌓여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릇이 많은 데도 매일 쓰는 그릇만 쓰는 엄마의 궁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좀 아껴야지.”
“그렇게 아껴서 대체 어디다 쓸 거야?”
나는 신경질을 내며 이런 질문을 했었다. 먼 훗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신혼집에서 발견할 줄 모르고. 그 그릇들이 고스란히 옮겨져 신혼살림이 될 줄도 모르고. 엄마가 평생 아껴서 새것으로 지켜왔던 이유는 결국은 나에게 주기 위해서였는지 모르고.
묵혀뒀던 울음이 해일이 되어 나를 덮쳤다. 그리고 이건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선물임을 깨달았다. 눈물을 다 훔친 나는 그릇을 신혼집 찬장에 넣었다. 그게 수십 년간 계속된 엄마의 고생을 가장 값어치 있게 보상하는 길이니까. 엄마가 준 그릇들 때문에 신혼집은 무거워졌지만, 괜찮았다. 집이 무겁다는 건, 누군가에게서 역사가 이어지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런데 아기를 낳은 후, 나는 엄마에게서 또 다른 뜻밖의 선물을 받게 되었다. 도톰한 목욕수건 한 장이었다. 엄마는 그게 한 번도 쓴 적 없는 새 수건이라고 했다. 그런데 수건을 넓게 펼쳐보니, 이런 문구와 숫자가 적혀 있었다.
'제삼의 물결, 1983. 7. 1'
“세상에”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삼십 년도 넘은 수건이었다. 게다가 ‘제3의 물결’이라니. ‘제3의 물결’이 농업혁명, 산업혁명을 넘은 정보화 혁명을 의미한다는 건, 이제 한국사 수업 때나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게다가 1983은 내게 너무나 친숙한 숫자였다. 바로 내가 태어난 해. 그렇다면 엄마는 정보화 시대의 한복판에서 얻은 수건을 서랍에 곱게 접어두고 수십 년의 세월을 보낸 것이다. 본인은커녕, 태어난 지 한 달 된 딸에게조차 사용하지 않다가, 그 갓난아기가 커서 또 딸을 낳고서야 비로소 꺼내놓은 것이다.
나는 수건을 뜨거운 물에 푹푹 삶았다. 새 수건은 더 새 수건 같아졌다. 소독을 마친 그릇도 마찬가지였다. 빛이 쉽게 바래지 않고, 뜨거운 음식을 담아도, 전자레인지에 들어가도 괜찮았다. 깨지지 않게만 조심한다면 꽤 오래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월이 흘렀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세월이 지나도 새것은 ‘새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건, 영원히 새것으로 지킬 수 있는 것. 문득 엄마가 수십 년간 나를 키워온 마음도 그릇과 수건을 지켜온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낳았을 때 그 새것의 빛깔과 향기를 잃지 않도록, 다치지 않게, 고장 나지 않게, 훼손되지 않게 그렇게 아끼며 키워왔겠다 싶었다.
엄마가 자기가 태어난 연도가 찍힌 수건처럼 고이 키운 게 나라면, 나도 어쩜 지금도 새것인 게 아닐까? 나도 1983년생이지만, 아직 새것이라고 믿으면, 삶은 뽀득뽀득 닦은 그릇처럼, 보송보송 삶은 수건처럼 산뜻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참 좋았다. 아낀다는 건, 처음엔 모두 새것이었음을 기억하는 일. 엄마는 내게 그 사실을 가르쳐주기 위해 평생을 고생스레 아끼며 살아온 건지도 몰랐다.
누군가의 딸이었던 삶은 누군가의 딸에게로 이렇게연결되는 건가 보다.1983년도 수건으로 목욕하고 나온 아이 몸을 감쌀 때마다, 도자기 그릇에 아이 음식을 담을 때마다 유서 깊은 집안의 역사와 전통을 느낀다. 좋은 것은 전부 자식에게 주고픈 마음. 그 마음은 골동품이 아닐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유산이 있으니, 내 아이는 훗날 부유한 아이가 될 것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