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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이 Oct 23. 2019

아이의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였을까.

그렇다면 나는 나를 어떻게 그렸을까.


“엄마, 이 책 좀 봐봐.”    


 

집에 놀러 온 엄마에게 그림책 한 페이지를 펼쳐서 내밀었다.      



“해님이가 이 그림 보더니 갑자기 ‘엄마!’ 그러더라. 아는 사람 만난 것처럼. 그런데 이 그림이 나랑 진짜 똑같지 않아?”     



그림책에는 고장 난 용수철처럼 바글바글한 곱슬머리를 하고 서 있는 한 여자가 있었다. 나라고밖에 할 수 없는 그림이었다. 제대로 묶지 않아 늘 엉킨 채로 사방에 뻗쳐 있는, 아이가 매일 봤을 내 모습이었다.    


 

“너랑 판박이네.”     



돌이 지난 지 몇 개월도 되지 않았는데도, 아이는 예리했다. 수많은 그림을 무심히 지나쳤지만, 엄마를 닮은 단 하나의 그림에겐 아는 척을 한 것이다. 때때로 아이의 눈에 엄마가 어떻게 보일지 궁금했는데 이렇게 간단히 답을 얻을지 몰랐다. 아이에게 엄마는 보글보글한 곱슬머리가 인상적인 여자였다.      



하지만 나는 정작 나를 나답게 그린 적이 없었다. 어릴 때 그린 사람은 죄다 커다란 눈망울에 늘어뜨린 긴 생머리, 가늘고 긴 팔다리, 잘록한 허리에 풍성하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공주였다. 미술 시간에 경험한 일을 그리라고 하면, 의상만 평상복으로 갈아입었으나 생김새는 여전히 '공주'인 그림을 그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사람을 그리라고 하면 보통은 자기 자신을 그리기 때문이다. 그게 그림으로 심리 분석을 할 때 기본 전제다. 사람 그림은 개인이 자신을 어떻게 지각하는가에 대한 표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아이들은 보통 남자를, 여자아이들은 보통 여자를 그린다. 만약, 자신이 아닌 인물을 그린다 해도, 그 그림 속에 자아개념이 어느 정도 반영된다.      



그렇다면 자기를 닮은 그림을 그리지 않는 아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진짜 모습은 원래 없는 것처럼 아름다운 공주 그림만 그리던 그 아이. 언제부터 그렇게 자기를 천천히 지워가기 시작한 걸까.      



처음 유치원에 갔던 때부터였을까. 선생님은 바닥에 줄지어 앉은 아이들 앞에 나를 소개했었다. 유치원 사회는 이미 질서가 잡혀 보였고, 뒤늦게 유치원에 등록한, 매력도 낮은 한 아이를 환영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사회생활이라곤 기껏해야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전부였던 나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몰랐다.     



소개를 마친 선생님은 나에게 어떤 줄의 맨 끝으로 가서 앉으라고 했다. 그 줄 끝에는 안경을 쓴 남자아이가 앉아있었는데, 내가 다가가자 불쾌하다는 듯 소리쳤다.      



“여기 앉지 마. 저쪽으로 가!”     



아이의 면박에 하는 수 없이 다른 줄의 맨 뒤로 자리를 옮겼다.     



“너 여기 아니잖아! 저쪽으로 가!”     



다른 줄의 아이도 나를 돌아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이쪽저쪽으로 자리를 옮겨 다녔다. 자리를 옮길 때마다 아이들은 경쟁적으로 나를 내쫓았다. 결국 나는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않는 어중간한 곳에 자리 잡았다. 울지도 않았다. 선생님께 이르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구나.’라고만 생각했다. 당시에는 내가 상처를 입었는지 몰랐다. 통점에 마비가 왔었는지도 몰랐다.   


  

그게 나였다. 친구가 없는 아이, 말수가 적은 소극적인 아이. 친구 관계를 가로막는 건, 외모보다 폐쇄적이고 자신감 없는 태도 때문이었지만, 당시에는 모든 문제가 머리카락에서 비롯됐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신념은 오랫동안 무의식을 지배했다.      



만약 내가 그림 검사를 받았다면, 걱정스러울 만큼 심각한 소견이 나왔을지 몰랐다. 환상이라는 탈출구를 통해 비현실적인 자아 정체감을 키우고 있다는 식으로.      



”그런데, 너도 어릴 때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꼭 이렇게 그리더라."      


“응?”     



엄마는 그림책에 있는 그림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뜻밖의 말을 했다.      



“어떻게?”     


“어떻게 그리긴. 이렇게 머리를 꼬불꼬불하게 그렸지.”   


  

그럴 리가 없었다. 전혀 기억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엄마에겐 확실한 기억인 듯했다. 대여섯 살쯤, 그러니까 유치원이나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꼬불꼬불한 머리카락을 그리곤 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한 가닥이 아닌, 두 가닥을 매번 정성스럽게 그렸다. 누굴 그렸냐고 물으면, 한결같이 "나"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나는 꽤 개성 있고 정직한 화가였다. 아빠는 작게, 엄마는 크게 그렸고, 언니 머리 위에는 빗금을 쳐서 곱슬머리인 나와 구별되게 그렸다. 놀림도, 따돌림도 경험하기 전이었다. 나는 눈치 볼 사람도 없고, 기죽을 사연도 없는, “그게 나이기 때문에 나예요.”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림책 속에서 엄마를 찾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아기처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대수롭지 않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 존재만으로도 사랑받는 것이 당연하기에, 어떤 이상형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맞추려고 노력할 이유가 없었던 사람.    


 

미셸 투르니에는 <뒷모습>이라는 책에서 머리 손질이 '타인의 존재가 휘두르는 가장 잔인한 폭거'라고 했다. 머리 손질을 한다는 건, 뒷모습에 신경 쓴다는 것이며, 여기엔 어느 만큼의 자기희생이 있다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은 개인을 함부로 평가하고 제멋대로 폄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판단과 평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개인의 가치를 좌지우지할 권리가 없다. 나에겐 보이지도 않는 뒷모습 따위에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내가 보는 나의 모습이 가장 중요한 것. 유치원 구석에 홀로 옹송그리고 앉아있는 그 시절 어린애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원래부터 너는 예쁘고 사랑스러웠다고, 그리고 너는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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