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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이 Jan 13. 2019

연필을 깎는 선생님

특수학급 K군 이야기

우리 교실에 올 때 필요한 준비물은 간단하다. 필통 하나, 그 안에 연필 한 자루, 지우개 한 개 이상이 들어 있으면 된다. 때로 숙제를 혼자서 해올 수 있는 아이는 숙제 보관용 비닐 파일을 하나 더 준비하면 된다. 그뿐이다. 더 필요 없다.


특수학급에는 웬만한 물건이 다 갖추어져 있다. 그래서 아이들이 특별히 따로 준비해야 할 것이 없다. 갖가지 준비물 준비로 아이들이나 학부모님을 들볶고 싶지 않다. 색연필, 사인펜, 색종이, 가위, 풀 등은 모두 공용으로 사용하면 되고 공책, 교과서, 문제집 등의 물건은 사물함에 넣어두고 사용하면 된다. 사실 특수학급에는 연필과 지우개도 충분하다. 나는 거의 모든 물건을 학생들과 공유하지만, 교실에 있는 연필과 지우개만큼은 공용으로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 연필과 지우개만큼은 꼭 학생 스스로가 준비할 수 있도록 한다. '준비물'의 개념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공부하러 온 학생으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물건이 있다는 것을 특수학급 아이들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필통 하나를 챙기는 것도 특수학급 아이들에게는 몹시 어려운 과업이다. 혼자서 물건을 챙겨본 적 없는 아이들이 많아 학기 초에는 몇 번 아무것도 손에 들지 않고 교실에 오는 경우가 있다. 초반에 몇 번 실수하는 건 이해해준다. 다음에는 꼭 가져오라고 타이를 뿐이다. 하지만 잊어버리는 게 반복될 때는 대처법이 있다. 그 대처법은 단순하다.

"다시 교실 가서 가지고 와. "

특수학급과 자신의 소속 반이 가까우면 다행인데 몇 층 차이라도 있으면 되돌아가는 게 꽤 귀찮은 일이다. 특수학급 교실에 들어오지도 못한 채 쫓기듯 자기 교실로 되돌아가서 필통을 가져와야 하는 건 꽤 고역인가 보다. 대개의 아이는 이 경험을 한 번 정도 하고 나면 필통을 가져오는 것을 잊지 않는다. 기억력이 아무리 나빠도 싫은 기억은 잘 잊히지 않기 때문이다.


필통을 가져오는 것은 좋은데, 그 필통 안에는 바로 쓸 수 있는 제대로 된 연필이 한 개도 없는 경우가 있다. 집에서 깎아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어떤 일이 지금 당장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비한다는 것은 고도의 정신능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내일 쓸 연필을 미리 깎는다는 것'은 그런 종류의 일이다. 집에 가서 가방을 열고, 필통을 열고, 연필 상태를 확인하고, 연필을 스스로 깎는다? 아이 혼자 하기엔 엄청나게 어려운 과정이다. 그래서 나는 연필을 안 깎아왔다고 아이를 혼내지 않는다. 연필을 안 깎았다고 혼내는 건 결국 아이를 혼내는 게 아니라 아이를 제대로 챙겨주지 않은 학부모님을 혼내는 것 같은 느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필은 학교에서 깎아도 되는 것으로 정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C군과 K군을 옆에 나란히 앉혀 놓은 수업시간이었다. 학습지로 공부한 내용을 점검하기로 했다. C군의 필통을 열었는데 연필 끝이 모두 뭉툭해서 쓸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안 그래도 글씨 쓰는 걸 싫어하는 아인데 뭉툭한 연필로 글씨를 쓰다가더 이상 글씨는 안 써지고 연필 나무가 종이를 북북 긁는 사태라도 벌어지면 얼마나 화를 낼까 싶었다. 나는 수업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별말 없이 C군 필통에서 연필 하나를 꺼내 교실에 있던 연필깎이로 깎아주었다. 연필깎이가 고장인지 연필이 제대로 고정되지 않아 조금 애를 먹었다.

"자, 이 연필로 써. "

C군은 당연하다는 듯 내가 깎은 연필을 넘겨받았다. 글씨 쓰기를 싫어하는 학생을 위한 교사의 맞춤형 서비스였다. C군은 군말 없이 내가 깎은 연필로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문제가 쉬워서 아이들이 혼자서도 학습지를 잘 풀었다. 어려운 문제를 푸는 걸 도와주려고 아이들 책상에 붙어 앉아 있었는데 정작 내가 할 일은 없어졌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이 문제를 푸는 동안 연필을 깎아 주기 시작했다. C군 연필을 다 깎고 K군 필통도 들여다보았다. K군의 필통에는 스무 자루도 넘는 연필이 가득 들어 있었다. K군의 가정 형편은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먹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것을 마음껏 누릴만한 형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필요하지도 않은데 필통 빼곡히 넣어놓은 연필은 K군의 작은 허영심 같아 보였다.


K군의 연필도 부러지거나 끝이 뭉툭한 것들이 많았다. 나는 필통에서 연필을 모조리 꺼내고 한 자루씩 깎아 다시 필통에 넣기를 반복했다. K군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잡아요?"

내가 왼손으로 연필을 꽉 쥔 상태에서 오른손으로 연필깎이를 돌리는 게 이상해 보였던 모양이다.

"연필깎이가 고장 났어. "

연필을 고정하는 장치가 헐거워서 깎을 때마다 연필이 뱅글뱅글 돌아갔다. 그래서 왼손으로 연필을 꼭 쥐고 있었던 것이다.

"연필깎이 새로 사요. "
"응, 그래야겠네. "

안 그래도 손가락이 아팠는데 K군이 선생님 심정을 알아주는 것 같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이윽고, C군과 K군이 거의 동시에 학습지를 다 풀어서 검사를 해 줬다. 딱 맞춰서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도 울렸다.

"정말 잘했어! 쉬는 시간이다. "

C군은 내 말이 끝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장난감이 있는 쪽으로 달려나갔다. 공부 시간은 안 지켜도 쉬는 시간은 철저히 지키는 녀석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계속 앉아 K군의 연필을 깎았다. 개수가 많다 보니 오래 걸렸다. K군은 연필을 깎는 선생님을 보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어째 오줌이 마려운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눈치였다. 엉덩이도 들썩거리는 것 같았다.   

"먼저 해도 돼요?"
"뭘 먼저 해?"
"고맙습니다, 먼저 해도 돼요?"
"?"

무슨 말이지?

"그래, 해!"
"고맙습니다. "

K군은 머쓱한 표정으로 내게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C군이 놀고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머릿속으로 재빨리 상황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 뜻이 짐작되는 순간 머리가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K군은 선생님이 연필을 다 깎아주면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선생님이 연필을 언제 다 깎을지 모르겠고, 자기도 쉬는 시간에 놀고 싶긴 하니까 내게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먼저 해놓고 놀러 갈 작정이었던 거다. 어쩌면 연필을 깎아주는 선생님을 혼자 남겨 두고 놀러 가버리는 게 의리 없어 보일까봐 그렇게 행동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계속 연필을 깎았다.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연필을 깎는 선생님을 생각해서 자리를 지켜주는 의리도 멋있거니와, 쉬는 시간에 놀지 못해 조바심이 난 아이다운 모습도 정말 귀여웠다. 나는 계속 웃음이 나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다음 날이었다. 교실에 들어온 K군의 손에 뭔가가 들려 있었다. 특수학급에 올 때 필요한 준비물은 연필 한 자루, 지우개 한 개가 들어있는 필통이 전분데 K군이 들고 온 건 낯선 물건이었다.

"이게 뭐야?"
"이거 쓰세요. "
"K군 것 아니야?"
"누나한테 이거 도움반에 가져가도 되냐고 하니까 가져가도 된대요. "

바로 하늘색의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연필깎이. K군이 집에 있는 연필깎이를 학교에 가지고 온 거였다.

"집에 연필깎이 있어?"
"집에 연필깎이 많아요. "
"이거 정말 선생님 써도 돼?"
"누나가 괜찮다고 했어요. "

나는 받아도 되는 게 맞는가 싶어 여러 번 되물었다. K군은 계속 괜찮다고 했다.

"그럼 좋아. 이제부터는 K군 연필은 학교에서 이걸로 깎도록 해. "


수업이 끝나고, 나는 K군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K군 어머니는 대수롭지 않은 듯 심드렁한 목소리로 그런 일이 있었냐고 했지만 나는 대단히 들떠서 K군을 칭찬했다. 어차피 집에서 연필을 깎아오지 않는 K군이었다. K군 연필을 깎을 용도라도 그 집 연필깎이를 교실에 갖다 놓는 게 합리적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많은 아이가 필통 하나를 잊는다. 기억력이 부족한 아이도 있고, 주의가 산만한 아이도 있고, 동기가 없는 아이도 있고, 부모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는 아이도 있고, 뭔가를 미리 계획해서 실행하기 어려운 아이도 있고, 만사가 다 귀찮은 아이도 있다. 특수학급에서는 아이가 필통 하나를 기억해서 매일 교실에 들고 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그런데 연필깎이라니? 특수교사가 K군과 같은 아이를 만난다는 건 그야말로 기적과 같은 일이다.


나는 잠자코 연필깎이를 학교에 가져오기 위해서는 어떤 사고 과정이 필요했는지 생각해 보았다. 꽤 복잡했다.

집에 간다 → 고장 난 연필깎이가 생각난다→ 누나에게 연필깎이를 가져가겠다고 말한다→ 연필깎이를 가방에 넣는다→ 학교에 온다→ 연필깎이를 들고 특수학급에 온다

K군은 이와 같은 길고 긴 과정을 스스로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게 놀라웠다. 어쩌면 그가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데 나 같은 선생님 따위가 필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누가 가르쳐줘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학습장애 때문에 특수학급에 왔지만 글을 읽지 못하는 것 따위는 아주 사소한 문제에 불과한 것 같다. 그는 세상에 필요한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다. 감동을 주는 사람은 세상에 누구보다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K군은 스스로 또는 저절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지 생각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연필을 깎아주는 것밖에 없는 것 같다. 그것도 쌩쌩 시원하게 잘 깎이는 K군의 연필깎이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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