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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이 Nov 11. 2019

엄마가 이석증에 걸린 후, 나도 이석증에 걸렸다-2편

함께 아파하는 모녀 사이가 되기 위하여


(1편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엄마는 할머니한테 엄마를 왜 낳았냐고 물어본 적 있어?"  


   

갑자기 이런 질문이 툭 튀어나왔다. 모든 것이 흔들리고 휘청거려서 현실감이 없어진 걸까. 어지러우니 어떤 얘기를 꺼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한 적 있지. 왜 없겠어.”


    

어지러운 신세는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전에도 수없이 들었지만 어지러운 상태로 들으니 새롭게 들렸다.     



1960년대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에서는 기성회비라는 것을 내야 했다. 가난한 시절이기에 미납자가 많아 선생님이 직접 돈을 받으러 집집이 방문했다. 엄마 집에도 담임 선생님이 찾아왔고, 엄마는 죄지은 사람처럼 방에 숨어 있었다. 엄마가 못 낸 돈은 450원이었다.     



선생님을 빈손으로 돌려보낸 할머니는 엄마에게 대뜸 중학교에 가지 말라고 했다. 중학교에 입학하려면, 기성회비를 완납해야 받을 수 있는 졸업장이 필요했다. 엄마는 엉엉 울면서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럴 거면 나를 왜 낳았어?"     



엄마의 눈물 맺힌 항변에 할 말을 잃은 할머니는 혼잣말처럼 이렇게 읊조렸다.    


 

"너도 자식을 낳아봐라. 그래야 에미 가슴 찢어지는 걸 알지."     



돈이 없어 자식을 학교에 보내지 못하는 부모는 얼마나 억장이 무너질까. 하지만, 엄마는 할머니 가슴을 찢어서라도 중학교에 가고 싶었다. 당돌하고 되바라진 자식이 되는 편이 중학교에 못 가는 것보다 나았으니까.      



그 후에도 엄마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엄마는 자기 고생담을 반복하며 회한에 잠기고,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경청하는 게 보통의 방식이었다. 다사다난한 인생 역정의 파노라마를 펼쳐지고 마무리되는 것을 끝까지 듣고 나서 나도 한 마디를 묵직하게 내려놓았다.    


 

"그런데, 엄마는 엄마만 고생했는 줄 알지? 나도 나름대로 고생 많이 했는데."     


"네가 무슨! 엄마가 안 해준 게 없는데."     


"엄마는 다 해줬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정말 최소한만 해줬어, 아주 기본적인 것만. 사실 나는 항상 부족하고, 아쉽고. 그랬었어."     



그 말을 하는데 또 핑하고 어지러웠다. 어지러움은 꼭 술기운 같았다. 나는 취중 진담을 하듯 생각나는 대로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부모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싶었던 마음으로 좀처럼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를.   


   

8살. 생전 처음 초대받은 친구의 생일날, 엄마에게 겨우 받은 동전으로 산 공책 한 권과 연필 한 자루를 들고 갔을 때, 다른 친구들이 들고 온 예쁘고 값비싼 선물에 주눅 들고 말았던 일을. 언니는 피아노 학원에 보내 줬지만, 나는 언니에게 배우면 된다며 아무 학원에도 보내 주지 않았던 일을.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나한테 2,000원 줬던 거 알아?"     


"그런 적이 있었어?"     



당시 2,000원은 집 앞 청과물 가게에서 콩나물과 두부를 사고도 천 원이 남는 큰돈이었다. 나는 그때 학교 앞에 처음 생긴 책 대여점에 가고 싶었는데, 회원 가입비 2,000원이 없었다. 엄마에게 돈을 달라고 하면, "집에 있는 책이나 읽어!"라는 핀잔을 들을까 봐 밤새 끙끙 앓았다. 결국엔 일기를 읽은 선생님이 손에 2,000원을 꼭 쥐여주셨다.      



빠듯한 형편에 언니와 동시에 대학에 다니던 시절에는, 생활비를 아끼려 매일 점심마다 1,000원짜리 한 줄 김밥만 먹었다. 몇백 원을 보태면 깻잎 김밥을 먹을 수 있는데 그것조차 사치라면서. 꼭 필요한 만남이 아니고서는 커피전문점에서 커피를 산 적도 거의 없었다. 그렇게 먹을 것, 입을 것에 돈 안 쓰고, 아르바이트하고, 장학금 받으며 부족한 등록금을 메꿨다. 돈이 부족해도, 엄마에게 용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지 않으며 버텼다.      



"나는 그런 줄도 몰랐네."      



마음의 수면에 잔잔한 파동이 퍼져나갔다.      



"내가 얘기한 적이 없었으니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엄마가 눈치채지 않길 바라며 담담히 말했다. 엄마가 지금까지 몰랐다는 것이 다행스러우면서도, 엄마가 지금까지 몰랐다는 것에 슬퍼지기도 했다.     



"다 가난해서 그랬지 뭐."     



엄마는 풀이 죽어 보였다. 예전에 엄마가 할머니에게 그랬듯, 나도 에미 심정을 찢어 놓은 거였다. 하지만 "엄마가 못 해준 거 없었어." "남부럽지 않게 키웠지."라고 말하려던 것을 참았다. 이제는 조금 당당히 말해도 될 것 같았다. 지금까지 감추고 있던 속마음, 그 소소한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내보여도 큰 허물이 아닐 만큼, 지금까지 나, 부모님 앞에 조숙하고 성실한 딸로 꽤 괜찮게 살아왔으니까.   


  

"우리 딸이 착했지, 그럼."     



엄마는 정해진 자리에 반듯하게 찍은 마침표처럼 말했다. 착하지 않다는 걸 알기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나는 슬픔을 가지고 엄마와 경쟁하는 삐뚤어진 딸이었다. 그래도 변명하고 싶었다. 나도 슬픔이 있음을 엄마가 알아주기 바랐을 뿐이라고. 이렇게 고백하면, 나도 아파해도 될 자격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고.   


  

긴 이야기를 끝낸 후, 우리는 시시덕거리며 같이 저녁을 먹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리고 어지러운 두 사람은 전보다 자주 만났다. 온종일 붙어있으면서 도움을 주고받았다. 엄마가 밥을 하면 나는 설거지를 했다. 아이는 평소에 못 보던 TV도 실컷 보고 불량한 과자도 실컷 먹었다.      



엄마의 해묵은 이야기도 계속되었다. 전과 조금 달라진 것은, 이젠 잘 기억해뒀다 어딘가에 적어놓고 싶어졌다는 거였다. 누군가의 딸이자 엄마로 살아갔던 그녀의 삶이 이젠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이제는 누가 더 아픈지 경쟁하는 모녀 사이가 아니라, 같이 아플 수 있는 모녀 사이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지럼증은 금방 사라지지 않고, 몇 달간 지속됐다. 이석증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에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뇌 MRI 검사까지 받았으나 원인을 끝내 밝히지 못했다. 이비인후과 의사는 이석증, 신경과 의사는 전정신경염이라고 했고, 신경정신과 의사는 공황의 일종일 수 있다고 했다. 이 어지럼증으로 아기는 계획했던 것보다 조금 일찍 어린이집에 들어가게 됐다. 그리고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후, 어지럽고 소란한 세차장 속 같았던, 어지럼증의 세상에서 나는 천천히 빠져나가게 되었다. 바깥은 환했고, 개운했다.      



하지만 엄마가 아프고 나서 나도 연달아 아팠던 건 여전히 미스터리다. 내면에 숨어있던 어린아이가 묵혔던 이야기를 꺼내려 마음을 흔들다 시야도 흔들어 버린 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그래도 한 아이의 농간 덕분에,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도 마지막에 웃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조심성 없이 비틀거리고, 흥청거리고, 주절거리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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