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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이 Sep 20. 2019

가난해도 총천연색으로 키우고 싶어

내가 낭비하고 싶었던 색깔에 대한 이야기



"50색으로 사자!"     



손에 묻지 않는다는 아이용 크레용 세트를 집어 들고 말했다. 마트 카트를 밀고 따라온 남편은 내가 뭘 고르든 상관없다는 눈치였다. 크레용 하나를 사는 게 이렇게 들뜰 일인가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기의 첫 필기구를 사는 건 나에게 특별한 의식이었다. 같은 종류로 12색, 24색 세트도 있었지만, 결국 내가 고른 건 다소 과한 크기의 50색 크레용이었다.   



  


상아색, 홍매색, 회갈색, 짙은 녹두색, 고엽색... 참 생소한 이름도 많았다. 어릴 때, 색이 수십 개인 크레용, 색연필, 사인펜, 물감을 가방에서 꺼내는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웠다. 12색 세트를 가진 아이들 사이에서 어찌나 우월해 보이던지. 너나 할 것 없이 하나만 빌려달라고 달려들었다. 50색 크레용을 사고 알게 되었다. 결국, 내가 돈을 주고 산 건, 낯선 색깔의 이름들이었다는 걸.     



세상의 색이 12가지 밖에 없는 줄 알았던 나는, 물론 그 탓만은 아니었겠으나, 미술 실력이 썩 좋지 않았다.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 선생님이 한 말은 "도화지 꺼내라.", "그려라."가 전부였다. 세상에 흰 도화지만큼 막연한 것도 없었다. 어쭙잖은 흉내로 밑그림을 그렸지만, 색칠은 어떻게 해야 잘하는 건지 몰랐다. 사물에는 늘 정해진 색이 있는 줄 알았다. 나무는 갈색, 하늘은 하늘색으로 뻔하게 칠했다.     



수채화를 그릴 때는 좀 난감했다. 색이 제멋대로 번지고 섞이기 때문이었다. 되직한 물감을 묻힌 붓으로 밑그림만 꼼꼼히 메꾸면 잘된 그림인 줄 알았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다. 주변의 색깔 부자들도 쭉 짜 놓은 물감을 붓에 찐득하게 묻혀 도화지에 펴 발랐다. 두꺼운 물감이 그대로 마르면, 유화도 아닌데 도화지 표면이 울퉁불퉁했다. 게다가 붓에 물감이 잔뜩 묻어있는데도 물통에 푹 담가 씻곤 했다. 물통에 담겨 있던 맑은 물이 진한 오렌지주스 색으로 예쁘게 변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아깝기도 하고 배가 아프기도 했다. 나에겐 제대로 된 물감이 없어서 더 그랬다.      



물감이라는 것은 왜 그리 빨리 소모되는 것일까. 주황이나 노랑처럼 예쁜 색깔일수록 더 빨리 동이 났다. 자주 쓰지 않던 색도 막상 쓰려면 하나같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나는 필요한 색들이 군데군데 빠져있는 물감이 늘 야속했다.      



"노란색이 없어."  

   

"왜 없어. 여기 있잖아."    


 

푸념을 늘어놓으면, 엄마는 늘 물감을 색색별로 짜서 굳혀놓은 팔레트를 가리켰다. 굳은 물감에 물을 섞어서 쓰면 새 물감이 필요치 않다는 거였다. 언니는 그렇게 썼다는 말에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언니는 팔레트만으로도 늘 멋들어진 그림을 그려냈다.      



반면 나는 요령이 없었다. 굳은 물감 위에 더러운 붓을 노랑, 살구, 연두, 분홍과 같은 예쁜 색들을 오염시키곤 했다. 새 물감이 있으면 다시 짜면 되는데 대체할 물감이 없으니, 그때부터 예쁜 색을 쓸 수 없게 됐고, 그날의 그림은 어쩔 수 없이 우중충했다.      



이것이 배곯지 않고, 등 따시게 살아온 베이비붐 세대에게 남은 가난의 추억이었다. 부모님이 나를 부족함 없이 키웠다는 걸 알고 있지만, 부족함이 없었다고 넉넉함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늘 최소한의 것만 주어졌고, 그걸 잃지 않기 위해서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다.     



인터넷에 회자되는 농담 중에 이런 게 있다. 로또에 당첨되거나 돈을 많이 벌면, 더는 떠먹는 요구르트 뚜껑을 핥아 먹지 않겠다는 이야기. 요구르트 뚜껑을 핥는 습관을 지닌 사람은 나 말고도 많아서, 이 농담에 공감하는 사람이 참 많았다. 사소한 것을 아끼는 게 습관이 되어버린 이들이 그 습관을 버린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대단한 사치니까.     



"나는 낭비하고 싶었던 것 같아."     



50색 색연필에 이어 대용량 유아용 물감이 든 택배 상자를 열며, 남편에게 말했다. 괜히 머쓱해서. 색깔별로 산 물감들은 욕실 한편에 놓았고, 아이는 목욕 때마다 벽면에 붙은 커다란 비닐 위에 마음껏 그림을 그렸다. 팔레트에 흥건하게 짜 놓은 물감이 유아용 붓에 가득 묻히는 광경은 볼 때마다 짜릿했다. 벽면 가득 치덕치덕 발라지는 물감을 볼 때마다 쾌감을 느꼈다. 나도 가끔은 함께 붓을 들고 낭비의 기쁨에 동참하기도 했다.   




  

"나 고아도 아니고, 넉넉하진 않아도 딱히 먹고 살 걱정은 안 했어. 제때 대학 졸업까지 했으니 아주 흙수저는 아니었던 것 같아. 이제 직장도, 집도 생겼으니 부모님이 날 키웠을 때보다는 형편이 나아진 건가. 그렇다고 해도 해님이를 금수저, 은수저급으로 키우진 못할 것 같아. 그냥 동수저, 스텐 수저 정도만 됐으면 좋겠다. 조금씩만 발전해도 그게 어디야."     



가난이 대물림되는 게 두려워 아이를 낳지 않는 요즘 시대에 아이를 낳고 휴직에 들어간 내가 외벌이하는 남편에게 위로라며 건넨 말이었다. 그래도 흙수저가 아니란 말로, 한평생 열심히 키워주신 부모님의 자존심을 지켜드리고 싶었다. 가난은 열등감이나 피해 의식만 남긴 건 아니었다. 결핍은 근성의 원천이었다. 그리고 빈 곳으로 세상을 들여다보는 남들은 겪지 못한 드문 기회였다.       



얼마 전에 육아 고민을 상담해주는 유튜브를 듣다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접했다. "너희 집은 왜 좁아?"라고 물어보는 자녀 친구에게 어떤 대꾸를 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알려달라는 말에 곰곰이 생각하다 이렇게 댓글을 달았다.


      

택배 두 개가 왔어. 커다란 상자에 돌멩이가 들어 있는 택배랑, 작은 상자에 다이아몬드가 들어 있는 택배. 넌 뭘 가질래? 아줌마도 큰 집에서 돌멩이를 키우는 것보다, 작은 집에서 다이아몬드를 키우는 게 더 좋아.    



나는 "집 크기가 중요한 게 아니야. 그안에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지가 중요한 거야."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 부모님이 나를 보물로 키우셨던 것처럼. 그리고 나도 물려줄 수저가 어떤 색이든 상관없이, 아이만큼은 총천연색 보석으로 키우고 싶다. 아이에게 색연필과 물감을 원 없이 사주는 건, 세상의 모든 색깔을 선물하고픈 상징적 의미이기도 하다.      



재력이 꿈의 크기를 결정하는 지금의 현실은 참 씁쓸하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빛은 몇 가지의 수저 색깔로만 구별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아이가 알았으면 좋겠다. 그러기에 세상의 색은 다채롭고, 너무나 아름다우니까. 그 빛깔의 이름을 알고, 그 이름을 부르고, 그 이름과 친하게 지내는 진짜 부자로 살아가기를, 가난한 엄마는 이렇게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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