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있어도 그리워지는 친정엄마라는 이름
"나 콩나물 대가리 볼 줄 몰라."
처음 악기를 배우러 가던 날, 엄마가 나를 불러다 놓고 수줍게 한 말이었다.
같이 배우는 사람들이 가방끈이 길다고 했다. 고졸 이상은 기본이고, 숙대 나온 사람도 있다고. 자기가 기성회비가 모자라 국민학교 졸업장도 못 받고, 야간 중학교 다니다 말다 한 걸 알면 다들 깜짝 놀랄 거라고. 음표를 못 읽는다고 학벌이 드러나는 건 아닐 텐데, 창피라도 당할까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래서 콩나물 대가리 교습을 시작했다. 줄에 걸친 것, 줄 사이에 끼인 것, 다시 줄에 걸친 것. 도, 레, 미. 딸의 초보적인 설명을 대단하다는 듯 듣던 엄마는 손끝으로 한 음, 한 음을 짚었다. 흡사 맨 앞줄에 앉아서 선생님 말씀 듣는 얌전한 초등학생 같았다.
그렇게 시작한 악기 공부였다. 처음엔 하모니카였고, 다음은 오카리나. 키에 맞는 악기를 계속 사야 하는 하모니카와 달리, 오카리나는 악기 하나로도 연주할 수 있는 곡이 많았다. 경제적이어서 좋았을까. 오카리나의 음색과 감성이 마음에 맞았을까. 엄마는 꽤 오래 오카리나를 배웠고, 이제 간단한 동요는 악보만 보고도 연주하게 되었다.
하지만 연주하는 모습은 좀처럼 보여주지 않았다. 복지회관 행사가 있을 때면 특별 공연에도 오를 실력인데도. 내가 꽃이라도 사 들고 가겠다고 하면, 대단한 공연이 아니라며 한사코 오지 말라고 했다. 악기 하는 할머니가 얼마나 멋있어 보이겠냐며, 어린 손녀를 앞에 내세워도 창피해서 안 된다며 연신 손사래를 쳤다.
그래 놓고는 내가 집으로 돌아간 후에야 혼자 투투투 불어 보는 모양이었다. 저녁이 되면 휴대폰에 음성 파일 몇 개가 도착하곤 했다. 오카리나 연주를 녹음한 오디오 파일이었다. 연주 실력보다 60대 후반의 나이로 녹음 앱을 사용하고, SNS로 파일을 전송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졸업장은 없어도, 엄마 가방끈은 나보다 긴 것 같았다.
어느 날, 엄마는 수업에서 좋은 노래를 배웠다고 했다. 제목은 ‘찔레꽃’이었다.
"엄마 찔레꽃을 불다가 울었잖아."
"왜? 노래가 슬퍼?"
"몰라. 장사익 씨가 찔레꽃을 부르던 장면이 생각나서 그랬나."
나는 검색창에 '장사익 찔레꽃'이라고 썼다. 어느 나이 지긋한 가수가 선 작은 콘서트 무대가 펼쳐졌다. 40세가 되어 뒤늦게 가수가 되었다는 가수가 부른 ‘찔레꽃’은 정말 구슬펐다.
"엄마 이 노래 맞아?"
"아닌데, 이거 아닌 것 같은데."
엄마는 휴대폰을 내밀며 오카리나 수강생의 단체 채팅방을 보여주었다. 거기엔 강사가 녹음한 찔레꽃 반주 오디오 파일이 있었다. 오카리나 멜로디는 없는 연주곡이라 확실치 않지만, 느낌에 옛날 동요처럼 같았다. 나는 검색창에 '동요 찔레꽃'이라고 다시 썼다. 그리고 이연실이라는 가수가 다시 부른 ‘찔레꽃’이란 동요를 찾을 수 있었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히 따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동요 <찔레꽃>
엄마에게 들려주니 이 곡이 맞다고 했다. 듣다 보니, 왜 엄마가 이 노래가 좋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평소 <따오기>나 <오빠 생각>, <클레멘타인>과 같은 동요를 좋아하는 게 엄마 감성이었다.
"엄마 그런데 나, 찔레꽃 어떤 꽃인지 몰라."
"찔레꽃 동샛말에 많았지. 울타리에 하얗게 피었었는데."
동샛말은 엄마가 나고 자란 동네 이름이었다. 어릴 때 동샛말 시골집에서 자고 왔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있었다. 언니와 나는 사촌들과 작은 방에서 자고, 엄마는 맞은편 방에서 외할머니와 자곤 했다. 항상 홀로 주무시다가 오래간만에 서울에서 온 딸과 한 방에서 같이 주무셨을 외할머니. 지금은 다시 만날 수 없는 곳으로 가신 우리 외할머니.
"찔레꽃은 따 먹을 수도 있어?"
"그럼 먹으면 얼마나 달큼한데."
"그래서 엄마가 이 노래 듣다 울었구나. 할머니 생각나서."
중학생이던 엄마는 서울 가서 취직하겠다며 하얀 찔레꽃을 따 먹던 그 동샛말을 홀로 떠났다. 불편한 다리를 가진 자신이 식구에게 짐이 될까 봐 그랬다. 어린 딸을, 그리고 아픈 딸을 홀로 보낸 외할머니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리고 타향살이 외롭고 고달플 때마다 엄마는 동샛말 옛집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내가 눈을 비비는 척 눈물을 닦아내며 슬쩍 보니, 엄마도 이미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할머니 보고 싶다.'라는 말을 하려다가 목이 메어서 그만두었다.
걷지 못하는 딸에게 "차라리 죽어!"라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던 할머니, "안 죽어! 나는 안 죽어! 내가 왜 죽어!"를 외치며 기어이 일어선 엄마였다. 할머니는 아들들은 다 학교에 보내 주면서도, 딸에겐 넌 이걸로 공부해도 된다며 헌 교과서만 던져주었다. 엄마는 그 헌 책을 하도 많이 봐서, 학교 다니는 외삼촌도 모르는 내용을 줄줄 외웠다. 국민학교에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영특함이었다.
그래도 할머니는 말만 야박하게 했던 것 같다. 엄마가 절뚝거리는 다리로 혼자 등교하다, 질척거리는 논둑길에 발이 빠져 고무신이 땅에 박혔을 때, 그깟 학교 다니지 말라는 할아버지의 면박에 엄마가 집으로 돌아와 엉엉 울었을 때, 두부 만들다 말고 달려와 엄마를 논둑 끝까지 업어준 건, 그래도 할머니였다.
"그러고 보니까 찔레꽃이라는 노래는 진짜 많다. 이런 노래도 있잖아. 찔레에꽃 붉게 피이이는 남쪽 나아라아 내 고오오오향."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나는 옛날 가수처럼 괜히 기교를 부려보았다. 그건, 가사와 음정이 익숙해서 저절로 부르게 되는 슬프지 않은 트로트 ‘찔레꽃’이었다.
"안 그래도 엄마 친구들이 찔레꽃 부르고 운다니까 그 노래 부르고 왜 우냐고 그러더라. '찔레꽃 붉게 피는~' 이 노래인 줄 알고"
"이 노래 듣고 울었다고 하면 웃기겠다. 쿵작쿵작 쿵작쿵작 찔레에꽃 붉게 피이이이는-"
네 박자 리듬에 맞춰 익살을 부리자 엄마는 웃음을 터뜨렸다. 외할머니 생각에 눈물을 멈출 길이 없었는데, ‘찔레꽃’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많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집으로 돌아온 저녁, 그날도 여지없이 SNS에 음성 파일 하나가 도착했다. 엄마가 오카리나로 연주한 ‘찔레꽃’이었다. 엄마가 연주하는 ‘찔레꽃’은 정말 듣기 좋았다. 그날 내가 엄마와 함께 찾아들었던 어떤 가수의 ‘찔레꽃’보다 더 듣기 좋았다. 호흡이 모자라서인지 오카리나 소리가 떨릴 때가 있었는데, 그게 흐느낌처럼 느껴져 더 심금을 울렸다.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는 찔레꽃이 얼마나 예쁜지, 어떤 향기가 나는지, 어떤 맛인지 몰라도, 찔레꽃을 사랑하고 기억하는 엄마는 안다. 엄마가 찔레꽃을 색과 향기와 맛으로 기억하는 것처럼, 나는 찔레꽃을 음악으로 기억하게 되겠지. 엄마가 ‘찔레꽃’을 연주하며 할머니를 떠올렸던 것처럼, 나는 ‘찔레꽃’을 들으며 엄마를 떠올리게 되겠지.
어떤 사람은 떠나가기도 전에 그리워질 수 있는 것 같다. 언젠가 엄마를 추억하게 되는 날이 온다는 생각하니 눈물샘이 터져 버렸다. 그 녹음 파일을 소중히 간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소중히 간직해야 할 이유 때문에 더 눈물이 났다. 나도 이제야 친정엄마를 떠올리면 눈물부터 나는 철난 딸이 되었나 보다. 진짜 그리워할 날이 오기 전에 더 사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