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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이 Nov 16. 2019

육아는 바둑의 복기와 같다.

나는 계속 엄마가 되어 갈 것이다.



아이를 낳는 것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아이는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동생과 잘 놀아주기로 소문이 나, 조카나 옆집 아이의 베이비시터 역할을 하곤 했다. 그러면서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 고아들의 아버지 페스탈로치의 위인전을 닳도록 읽었다. 헬렌 켈러라는 책은 그녀의 선생님인 설리번이 좋아서 읽었다. 삶의 방향은 일찍부터 정해진 것 같다. 아이를 보살피고 가르치는 일. 결국 나는 그 일을 하기 위해 특수교육을 전공하고 교사가 되었다.    


  

학교에는 형편이 어렵거나 돌봄이 절실한 아이들이 있었다. 때로는 부모가 해주지 못한 역할을 맡기도 했다. 꼭 내 아이가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세상엔 부모에게 버림받거나 학대받는 아이가 많으니, 그들을 평생 돕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보람찬 인생이라고. 사실을 아이를 낳을 자신이 없던 거였다. 구체적으로는 내가 낳은 아이가 나를 닮는 게 두려웠던 거였다.      



그런데 정작 아기를 낳아보니, 아기는 예뻤다. 나를 닮아서 예뻤고, 닮지 않아서 예뻤다. 아기가 있으면 화보를 뒤적일 필요도, 미술관에 갈 필요도 없었다. 그냥 쉴 새 없이 종알거리며 온종일 내 곁을 맴도는 작품을 감상하기만 하면 되었다. 보기만 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은은한 우유 향을 맡을 수 있고, 나직한 숨소리를 들을 수 있고, 이로 살짝 깨물어 살의 말랑함도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살아있어서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니 질리지도 않았다.     



아기를 낳는다는 건, 되감기 버튼이 누르는 것과 같았다. 판국을 살피기 위해 다시 처음부터 놓아 보는 바둑의 복기처럼, 인생 전체를 복기하게 됐다. 기억을 통한 복기는 정확하지 않아서 세세한 부분은 생략하거나, 왜곡하고, 기억 너머의 시간은 공백으로 남겨 놓지만, 출산을 통한 복기는 달랐다. 아기의 인생이 내 것과 완전히 같지 않을지라도, 아기에 빗대어 내 과거를 조금이라도 유추할 수 있었다.     



아기가 예쁠수록, 과거의 내가 얼마나 예뻤을지 상상이 되었다. 아기가 소중할수록, 과거의 내가 얼마나 소중했을지 깨달았다. 아기는 아주 작은 인간이었지만, 꽤 너른 품을 가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강하고, 대범하고, 의연했다. 아이의 특별함을 발견할 때마다, 애초에 내게도 있었을 특별함도 기대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해묵은 우울과 열등감, 상처와 콤플렉스가 가득했던 나, 지금까지 자신을 온전히 사랑한 적이 없었던 나도 처음엔 사랑스러운 아기였음을 알았다. 출산과 육아는 자신을 잃는 일이 아니라 되찾는 일이었다. 아기는 어쩜 나를 찾아주고 제자리로 되돌려주려고, 선물처럼 우리에게 온 건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자, 묻어놓고 없는 것처럼 지냈던 과거의 상처도 들여다볼 용기가 생겼다. ‘가장 고백하기 힘든 사연이 그 사람 생에서 가장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라는 스티븐 킹의 소설 <시체>의 첫 문장처럼, 나는 가장 하기 힘든 이야기를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곱슬머리인 것이 콤플렉스였다거나, 어릴 때 왕따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쉽게 꺼내지 못했다. 그런 주제로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회복의 증거였다. 글로 기록된 과거는 내게 더는 상처를 주지 않았다.      



또, 부모님과 나와의 관계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앵무새는 태어나면서부터 거울 속의 자신을 알아보고 깃털 손질까지 할 수 있지만, 사람은 돌이 되기 전에는 자신을 알아볼 수 없다고 한다. 나도 거울 속에 내가 나인지 모르던 시절을 지나왔다. 거울을 볼 줄 모르던 시기에 부모님의 반응은 자기 존재가 빛인 것을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내가 아기를 끔찍이 사랑하듯, 부모님도 나를 그렇게 사랑하셨음은 당연했다.     



지금도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건 나라고 말한다. 이제 아줌마라는 말이 어울리게 된 딸. 목이 늘어난 티셔츠에 헝클어진 머리, 눈곱도 떼지 못한 얼굴을 하고 아기를 안은 꾀죄죄하고 추레한 딸을 보고도 그런다. 새로 태어난 손녀가 아니라, 자기 배로 낳은 자식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게 부모인가 보다.   


   

물론, 늘 좋기만 한 관계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신기하다. 때로 살갗 위를 지나가는 때수건처럼 매서울 때도 있지만, 따뜻한 물을 끼얹듯 깨끗하고 개운하게 헹궈지기도 한다. 오해와 애증에 얼룩진 관계일지라도, 서로가 서로를 만나게 된 분명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걸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면 그게 행운일 것이다.      



난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아기가 나를 선택하는 상상. 천상의 구름 위에 앉아서 수많은 얼굴을 내려다보던 아기가 "그래, 이 사람이 좋겠어!"라며 내 얼굴을 손가락으로 콕 찍는 상상. 그렇다고 내가 엄마로서 대단한 자질을 갖췄다고 자신하는 건 아니다. 아기는 단지 자신과 케미스트리가 가장 잘 맞는 대상을 골랐고, 그게 나였을 뿐이다. 다른 아기에겐 별것 아니어도, 자기에겐 대단한 강점이 될 어떤 면이 내 안에 있었을 거다.    


 

문제는, 아기는 태어나면서 기억을 잃었다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수많은 상처는 처음 아기가 그에게서 흡족하게 여겼을 부분이 뭔지 몰라서 생긴 시행착오의 결과일 것이다. 그래도 나는 믿는다.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기 자식에게 최상의 부모가 될 자질을 이미 갖추고 있다고. 단지 그 자질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라고.     



보잘것없고 미약한 우리를 미래의 발전 가능성만 믿고 부모로 택해 준 고마운 아기였다. 그 무모한 베팅에 조금이라도 책임지기 위해서, 아기에게 딱 맞는 내 특별함을 찾아야겠다. 아기와 내가 특별한 합을 맞추게 되는 그날까지, 나는 계속 엄마가 되어 갈 것이다. 엄마 같은 엄마, 그리고 엄마다운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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