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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이 Sep 17. 2019

아기는 항상 듣고 있었다.

파블로프의 개와 사막여우



누구나 한 번쯤은 '파블로프의 개'라는 유명한 실험에 대해 들어봤을 것이다.



러시아 학자인 파블로프는 먹이를 보면 침을 흘리는 개에게 먹이를 주기 전에 항상 불빛을 보여주었다. 그 후 개는 불빛만 보아도 침을 흘리게 됐다. 처음에는 침 분비와 아무런 상관이 없던 불빛이었지만, 먹이를 주는 행위와 반복적으로 '연합'되다 보니 '학습'이 일어나, 불빛이 먹이와 같은 반응을 유발한 것이다. 이것을 고전적 '조건화'라고 부른다.  



특수교육에서는 행동 심리학이 기초적이며 기본적인 이론으로 꽤 중요하게 다뤄지곤 했다. 그래서 전공 수업 첫 시간에 파블로프의 개에 대해 배우는 건, 성경을 창세기부터 읽는 것과 같았다. 인간의 행동을 개를 통해 해석하는 게 영 불편하게 느껴질 땐, <어린 왕자>의 한 장면을 떠올리면 됐다. '조건화'조금 낭만적으로 표현하면 '길들인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사막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길들인다는 것'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런 예를 다. 여우는 빵을 먹지 않아 밀밭을 봐도 아무 감흥이 없지만, 자신을 길들인 후에는 황금빛 밀밭을 볼 때마다 어린 왕자의 황금빛 머리카락을 떠올리게 될 거라고. 개와 무관했던 불빛이 먹이와 연합되는 것처럼, 여우와 무관했던 밀밭 어린 왕자와 연합된. 그래서 개가 불빛에 침을 흘리듯, 여우는 밀밭을 보며 어린 왕자를 떠올리는 것이다.



나는 사막여우가 '조건화'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설명하는 인물이라생각한. '조건화'라는 게 행동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길들인다는 것'은 마음의 변화강조하고 있다. 사막여우는 '길들인다는 것'의 다른 뜻은 '관계를 만든다.'라고 설명했다. 관계가 없으면, 아무 변화도 일으키지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는 부모와 자식, 교사와 제자, 나아가 모든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내겐 사막 여우는 아기였다. 그리고 사막여우에게 난, 낯선 별에서 온 인간이라는 낯선 종족이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는 눈을 뜨지 못했다. 나 아닌 다른 에게 안겨도, 아기는 생전 처음 본 이의 젖을 힘차게 빨았을 것이다. 아기가 눈을 이후에도, 아기가 나를 알아보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흑백만 구별한다는 아기의 눈은 대략적인 사람의 형체만 겨우 훑 것처럼 보였다.



아기는 젖병을 빨고, 트림하고, 딸꾹질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 배냇짓을 하며 잤다. 온종일 아기를 먹이고, 닦이고, 안고, 재웠지만, 나는 어쩐지 항상 혼자인 기분이었다. 먹을 것을 주면 울음 그치고, 안고 흔들면 잠에 들었지만, 그건 꼭 내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기의 엄마가 나여야 하는 이유는 별로 없었다. 그야말로 서먹한 관계였다.



아기는 누에고치 같았다. 모로 반사로 팔과 다리를 허우적거리는 것을 안정시키기 위해 온몸을 속싸개로 꽁꽁 감쌌기 때문이다. 나는 가만히 누워있는 아기 곁에 일없이 앉아 있다. 방안은 적막하기만 했다. 아기가 자면 누워 쉴 수 있었지만, 아기가 깨어서 멀뚱 거리, 적막의 책임이 엄마에게 있는 것 같아 안절부절못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지만 아기에게 뭐라도 말을 붙여야 했다. 원맨쇼 특수학급에서도 자주 해서 생소하진 않았지만, 잦은 수유로 충분히 잠을 못 잔 상태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때로는 말을 거는 것보다는 노래를 불러주는 쪽이 조금 편했다. 하루에 삼십 분 정도는 노래방에 혼자 들어가 마이크를 잡고 있다고 생각하면, 무료한 시간도 비교적 쉽게 흘러갔다. 노래를 불러줘도 아기가 무엇을 알긴 알고 들을까 싶긴 했다. 알고 듣는다고 해도, 알고 있다는 걸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엄마가 옆에 있는 게 좋으면 얼굴을 보고 한 번 방긋 웃어주는 것도 좋으련만, 그것조차 제 뜻대로 하기 어려운 시기였다.



신생아기부터 내가 가장 많이 불러줬던 노래는 '사과 같은 내 얼굴'이었다. 아기와 신체 접촉을 많이 하는 게 좋다고 하니, 나는 이 노래에 맞춰 아기의 몸을 하나하나 만져주었다. "사과 같은 내 얼굴, 예쁘기도 하지요."를 부를 때는 아기 얼굴선을 따라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눈도 반짝"을 부를 때는 아기의 눈두덩이를 살짝 만졌다. "코도 반짝"에서는 코끝을, "입도 반짝반짝"에서는 입술을 만져주었다.



'사과 같은 내 얼굴'은 나 홀로 노래방의 포문을 여는 노래였다. '사과 같은 내 얼굴'을 부르고 나면, 다른 노래 생각나는 대로 불렀다. 그래서 다른 노래는 할 때도 있고, 안 할 때도 있지만, 시작 노래를 빠뜨리진 않았다. 신기한 건, 아기도 이 사실을 알고 있더라는 것이다.



느 날처럼 "사과 같은 내 얼굴"의 첫 소절을 부르며 아기 얼굴을 매만졌을 때였다. 다음 소절을 부르려고 준비하는 그 짧은 순간, 나는 아기가 눈을 질끈 감는 것을 봤다. "눈도 반짝"이라는 다음 소절에서 다가올 엄마의 손길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엄마가 눈두덩이를 만질 때 반사적으로 눈이 감기는 것과는 달랐다. 아기는 내 행동을 예상하고, 기대하고, 준비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신생아의 머릿속에 엄마의 노래가 재생되고 있음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심장 소리를 듣고, 살결을 만지고, 체온을 느낄 때도 실감 나지 않았는데, 새삼 아기가 살아있는 인격체로 느껴졌다. 아기는 언제부터 내 목소리를 제대로 듣고 있었던 걸까. 어쩌면 뱃속에 태아였을 때부터 내 목소리를 들으며, 목소리의 주인인 '엄마' 존재를 희미하게나마 떠올렸던 것일까.



아기가 황량한 사막 같은 세상에 홀로 떨어져 살아가던 사막여우라면, 자주 들어 익숙한 엄마의 노랫소리만큼 반가운 게 없을 거란 생각이 다. 그 노래를 불러준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노래 가사에 맞게 아기에 눈을 감게 해 줄 사람도 나밖에 없었다. 내 노래는 황금빛 밀밭처럼 아기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이라면, 나는 이제 아기에게 유일한 사람이 된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길들여진 것이다.





문득 프랑스의 유명 패션 잡지 엘르의 편집장이었다가 43세의 나이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전신 마비가 된 장 도미니크 보비가 떠올랐다. 그가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왼쪽 눈꺼풀 하나였는데, 원하는 알파벳에 눈을 깜박이는 신호를 주는 방식으로 <잠수종과 나비>라는 책을 썼다. 그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서는 눈을 깜박인 횟수는 20만 번이었다.



하지만 내 아기단 한 번의 눈 깜박임만으로도 한 권의 책에 상응하는 이야기를 담을 수 있었다. 쉽게 말할 수 없는 이야기는 항상 그런 것 같다.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감동이 있다. 내게 아기는 늘 수수께끼지만, 시간을 들여 풀이할 가치가 있다.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한 글자, 한 글자 더듬어나가고 추측해나가면 된다.  



너와 네가 관계를 맺고, 너로 인해 내가 변하고, 나로 인해 네가 변하는 이 마법 같은 길들임 평생 처음 받아본 선물 . 육아에 지칠 때마다, "너의 장미가 그처럼 소중하게 된 건, 네가 네 장미를 위해 소비한 시간 때문이야."라는 말에 위로를 받는다. 아기에게 주었던 엄마의 수많은 시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시간 덕분에 우리는 '연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수많은 장미 중에 내가 직접 물을 주고 바람을 막아 준 단 한 송이의 장미꽃을 위해, 오늘도 나는 다시 힘을 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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