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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이 Jun 25. 2019

어디서 배웠는지, 출처가 분명한 아기의 말들

아꼬, 아이시, 그리고 짜잔 속에 펼쳐진 언어의 풍경



어린이집에 다닌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아기는 새로운 말 하나를 배워왔다.



"아꼬!"



나는 그 말을 어디에서 배웠는지 알다. 해님이보다 6개월이나 일찍 태어난 아이, 유일하게 성별이 같은 어린이 친구에게서였다.



둘은 서로의 집을 오가며 자주 어울렸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따로 놀았지만, 서로 의식하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상대가 자기 장난감을 만지는 것에 늘 민감했는데, 배가 고프거나 피곤할 땐 민감함이 극에 달했다. "아꼬야!"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도, 그런 장난감 분쟁 중에서였다. 친구는 해님이의 손에 들려있는 장난감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었. 친구 엄마의 해석에 따르면 "아꼬야!"는 "아기 거야!"의 준말이라고 했다.



'자기 거'를 '아기 거'로, '아기 거'를 '아꼬'로 발음하 건, 그 아이만의 독특한 발상이었다. 해님이가 우연히 똑같은 말을 생각해냈다고 생각하긴 어려우니, 친구에게 듣고 배운 거라고 판단하는 게 옳았다. "아꼬"라는 말은 해님이에게 꼭 필요한 말이었다. "아꼬"라는 말의 강력한 힘을 알았을 테고, 자신도 친구처럼 자기 장난감을 지키기 위해 "아꼬"라는 말을 무기처럼 쓰고 싶었을 테니까. 










이렇듯 아기는 자기에게 쓸모 있는 말들을 야금야금 주워 모다가 새로운 말을 하나씩 꺼냈다. 도토리로 볼을 가득 채웠다가 하나씩 툭툭 뱉는 다람쥐 같았다. 개중에는 모두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도 있었다. 출처가 자신이 아니라고 엄마, 아빠 모두가 부정, 바로 "아이시"라는 말이었다. 그 말은 꽤 이른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치욕적인 건, 해님이의 "아이시"가 "엄마"보다 먼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외국어를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우는 게 욕이라는데, 아기는 그 원리를 충실히 따 것이다. 



아기는 말의 용법도 정확히 알 있었다. 블록이 잘 끼워지지 않는다거나, 강제로 이 닦기를 해야 한다거나, 엄마가 식탁에 올라가지 못하게 의자를 치워버릴 때, 아기의 입에서 바람이 새는 것처럼 시옷 소리가 흘러나왔다. 훈육을 하기엔 이른 시기였기에, 그 말이 나올 때마다 "아이참! 기분 나빠!"라고 말해주며, "아이시"를 "아이참"으로 바꾸려고 유도해봤다. 하지만 녹록지 않았다. 무시를 통해 그 말의 기능이 사라지도록 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어른이 그 말을 쓰지 않는 게 중요했다.



하루는 내 입에서 몇 번이나 그 말이 튀어나오는지 세어. 무른 똥이 기저귀의 전후 사방으로 샌 것을 목격했을 때 그 말이 나왔고, 이유식을 만들려다가 쌀가루가 왈칵 쏟아져서 바닥에 흩어졌을 때 그 말이 나왔. 육아에 대한 피로도가 극에 달했을 때, 나는 더 자주 그 말을 썼다. 그때의 나는 한 개의 바람 빠진 풍선이었다. 풍선에 크고 작은 침을 찔러 넣는 사건들이 생길 때마다, 나는 쉬익쉬익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거였다.



아기에게 나쁜 말을 들려준 것도, 그런 말을 통해서 감정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도 결국 나였다. 아기와 많은 시간을 시간을 보내고,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나였다. 하지 이 사태 엄마 책임만 있는 건 아니. 나쁜 말보다 좋은 말을 훨씬 많이 해주었지만, 나쁜 말이 스치는 찰나를 놓치지 않은 건, 아기. 들은 말 중에서 자기가 쓸만할 말을 쏙쏙 골라낸 건, 그만큼 아기가 야무지고 똑 부러지 때문이었. 아기는 제 삶에서 가장 재미나고 쓸모 있는 것들을 놓치지 않았 뿐이다.



아기 신분이란 , 의지대로 뭔가를 하려고 할 때마다 실패하고, 좌절되고, 무시당하는 거였다. 어른처럼 굴고 싶어도, 사사건건 간섭하고 훼방하는 엄마라는 방해꾼이 있으니, 스트레스도 심했을 것이다. 이때 아기는 우는 것에 안주하지 않고, 에너지가 덜 들면서 스트레스도 풀 수 있는 간편한 방법을 찾아다. 그게 '말'이고, "아이시"였다. 게다가  말을 쓰면 어른들이 당황하면서 그 말을 멈출 때까지 동분서주하며 원하던 것을 들어준다는 것도 알았다. ''의 쓸모를 스스로 터득했으니,  다른 '말'을 배울 날도 머지않은 것이다. 참 지혜로운 아기였다.








물론, 아기가 내게서 배운 말이 "아이시"만 있는 건 아니다. 개중에는 건전한 것많이 다. 아기가 닫힌 방문을 잠자코 두드리며 "똑똑똑, 누구세요?"라고 했던 말은 내가 해님이와 책 읽고, 놀이할 때 수없이 반복한 말이었다. 머그잔만 보면 손을 갖다 대 보며 과장된 목소리 "앗, 뜨거", "앗, 차거"를 연발하는 것도, 매일 엄마의 커피가 '핫'인지 '아이스'인지 컵을 직접 만져보며 확인했던 수많은 경험이 만들어 낸 말이었다. 



출처가 엄마인 아기의 말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단연 "짜잔"이다. 최대한 재밌고 드라마틱한 상황을 연출하고 싶을 때 쓰던 말이었다. 비슷한 말로는 "우와"가 있는데, 용법이 조금 달랐다. "우와"는 새로운 것을 보고 감탄하는 말이고, "짜잔"은 로운 것을 감춰뒀다가 공개하면서 고조된 기대감 폭발시키는 말이었다. "짜잔"이라 외치는 순간, 어디에선가 어두운 가상의 무대 위에 동그란 핀 조명이 켜지는 것 같았다. 그 순간만큼은 삶이 신기하고 극적인 마술 쇼 됐다.





얼마 전 내 생일 있었다. 케이크 이벤트를 좋아하는 아기에게는 남의 생일은 본인의 생일만큼이나 신나는 날이었다. 남편이 냉장고에 넣어놓은 케이크를 개봉하기 시작했다. 주섬주섬 상자를 열려고 하는데, 셀로판테이프가 너무 견고하게 붙어있어서 떼어내는데 시간이 걸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기는 빨리 케이크를 보고 싶은 마음에 조바심을 냈다.

 


"짜잔 짜잔 짜잔 짜잔 짜잔 짜잔"



아기는 케이크 상자를 개봉하는데 걸리는 단 몇 초의 시간을 "짜잔" 소리로 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케이크가 꺼내져 상자 위에 올라갈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아기는 "짜잔"이라는 말을 할 기회를 엄마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미리 선수를 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그 말을 여러 번 해서, "빨리 열어서 케이크를 꺼내 주세요. 빨리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고요."라는 속마음을 전하고 있는 듯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기는 소꿉놀이 장난감으로 상을 차 들이밀 때도 "짜잔" 했다. 키위를 반으로 썰어 까만 씨가 토도독 박힌 속 모양 확인할 때도, 여지없이 "짜잔" 다.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날 때, 보이지 않던 것이 그 모습을 드러낼 때, 아기는 사소한 것이라도 "짜잔"하며 환영다. 아기가 감탄하고 환호하는 모든 것을 보고 있자면, 내가 사소한 일을 사소한 것으로 정하는 기준을 싹 다 지워 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 뎁 로이 박사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집에 11대의 카메라를 설치하고 3년 동안 하루 평균 10시간을 촬영하며 자기 아들의 언어를 연구했다고 한다. 연구 끝에 그는 '언어의 풍경'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물"이라는 한 단어를 배우기 위해,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와 이웃들, 그들과 함께 갔던 여름날의 바닷가, 계곡물과 같은 언어의 풍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언어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였습니다."



생각해보면 해님이도 그랬다. 그녀가 태어난 지 이제 20개월, 하나하나 수집하여 서른 개가 훌쩍 넘은 단어 목록 속 아기가 만난 사람들, 좋아하는 장난감과 책, 그리고 함께 한 추억 있었다. "끼끼"는 해님이가 좋아하는 토끼 인형이었고, 그녀가 가장 먼저 말한 동물 이름이기도 했다. "아치"는 해님이가 좋아하는 그림책의 주인공 고양이 이름이었다. "바이 바이"는 잠깐씩 틀어준 TV 영어 채널에서 배운 인생 최초의 영어 단어였다.



한때는 로봇공학자였던 뎁 로이 박사의 말처럼 아기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힘껏 느끼고 힘껏 배우며 살아가고 있었다. 평범한 말도 아기 속에 들어갔을 때 그 말은 더 풍성하고 다채로운 빛깔을 냈다. 엄마와 아기는 같은 말을 쓰며, 함께하는 공간을 보다 넓고 견고하게 만들어 갔다.  



매일 아침 조금씩 달라져 있는 아기의 모습은 그야말로 "짜잔"이다. 오늘은 또 어떤 새로운 말을 하게 될지, 그 말얼마나 많은 풍경과 이야기를 담고 있을지 기대하게 된다. 옹알이 일색이던 아기의 입에서도 언제 그랬었냐는 듯 제대로 된 문장이 술술 흘러나오는 날이 올 것이다. 생일 케이크 상자를 여는 것 같은 "짜잔"도 좋지만, 너무 한꺼번에 변해버리진 않았으면 좋겠다. 이 아름다운 언어의 풍경 속에 자기만의 메뉴판을 펼아기 선택을 기다리 옆에 가만히 서있는 것큼 설레는 일도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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