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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이 Jun 15. 2019

때로는 엄마를 찾아도 괜찮아

돌잡이 아기가 책장을 넘기듯 그렇게 인생의 한 장을 넘기면 된다.



예전에 황정민이란 영화배우가 시상식에서 이런 수상소감을 다.



"솔직히 저는 항상 사람들한테 그래요. 일개 배우 나부랭이라고. 왜냐하면 60명 정도 되는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이렇게 멋진 밥상을 차려놔요. 그럼 저는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는 거거든요."



서글서글한 인상에 어울리는 순박한 말투, 수상의 공로를 자기 자신이 아닌 스태프에게 돌리는 겸손함으로 이슈가 된 그의 이내 '수상소감의 정석'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일종의 관용어 되어, "남이 거의 완성해놓은 일에 마지막에 참여해서 칭찬과 축하를 한 몸에 받다."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백 년쯤 지나면 속담 용어 사전에 "다 차려진 밥상에 밥 숟가락 얹은 격"이라는 말이 등재될지도 모르겠다.



특수교육에서 "다 차려진 밥상에 밥 숟가락 얹는 것" 같은 교육 방법이 있다. '최대-최소 촉진'이라 부르는데, 처음에는 최대 촉진을 제공하고, 촉진의 양을 점차  방법이다. 처음에는 학생의 손을 움켜쥐고 움직이는 것처럼 신체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을 쓴다. 그러다 보면 학생 것이라 할지라도 교사가 대신 처리 일생긴다. 일기 쓰는 시간 학생 입장이 되어 일기 대신 쓰고, 그림 그리는 시간 학생 대신 그림을 그린다. 하지만 항상 1%라도 학생이 해야 할 몫을 남겨 놓는다. 학생이 약간의 수고를 보태야 비로소 100%가 되는 상황을 연출하려는 의도다.



교사가 한 일이 아무리 아도, 결과물은 학생이 쓴 일기, 학생이 그린 그림으로 간주한다. 학생의 한 일이 아무리 적어도, 공은 전부 학생에게 돌아간다. 물론, 매번 도와주기만 해서 의존성이 커지도록 내버려 두진 않는다. 처음에 90%의 도움을 줬다면, 80%, 70%, 60%... 와 같이 도움의 양을 줄여나간다. 처음엔 몸으로 도왔다면, 다음에는 말로만 도와주고 그다음에는 손으로 간단히 단서 준다. 개인의 역량을 키워, 결국 자신의 힘으로 해낼 수 있도록 돕는 게 목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학생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 과제를 100% 혼자 수행할 능력이 갖추지 못하게 될 때이다. 그래 도움을 철회하지 않는다.



도움을 받든,

받지 않든

모든 것은 끝내 완성된다.

해피엔딩이다. 



혹자는 그게 진실한 거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엄밀히 말하면 누가 대신 해준 일은 학생이 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눈속임이라고 생각해도 상관없다. 처음보다는 마지막을, 과정보다는 결과를 잘 기억하는 사람의 어리석음을 이용하는 것이라 비난받아도 괜찮다. 그렇게라도 단 한 번 성공을 경험할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이라도 가리고 싶지 않 게, 선생님의 마음.






아기를 낳아보니, 엄마의 마음도 비슷다. 세상의 많은 엄마들은 특수교육을 배우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촉진 방법을 쓰고 있 것이다. 혼자 밥을 먹는 아이를 위해 밥을 담은 숟가락에 적당 크기 반찬 올려놓은 다음, 가만히 기다려주는 일 그런 예다. 아이가 스스로 숟가락을 들어 입에 넣는 1%를 하게 하려고, 어른은 99%의 작업을 미리 해놓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이가 한 술을 혼자 뜨면 엄마는 호들갑 떤다. 이제 우리 아이도 혼자 밥을 떠먹을 수 있게 됐다면서.



손이 야물지 않아 스티커를 떼는 것을 어려 아이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바짝 달라붙어 있는 스티커 한 끝을 미리 떼어 살짝 들리게 해서, 아이가 그 끝을 엄지와 검지로 쉽게 뗄 수 있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이가 스티커를 떼어내면 엄마는 유난스 칭찬을 하게 된다. 우리 아이가 스티커를 뗄 수 있다고. 혼자서 정말  해냈.



아기에게 책장 넘기기를 가르칠 때도 그랬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 키우고 싶었던 나는 이른 시기에 꽤 많은 보드북을 샀다. 보드북은 일반 그림책보다 책장이 두껍고 딱딱해서 아기 손에 잡기 좋았다. 하지만 책장을 한 장 넘기는 건 여전히 웠다. 해님이는 혼자 앉게 된 시기부터 책장을 혼자 넘기고 싶어 했다. 여러 장의 책장이 한꺼번에 넘져도 자기 책이니, 자기가 넘겨보겠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모든 책이 한두 번에 다 넘겨져 시시하게 나버리 일쑤였다.



아기가 눈치채지 않게 도울 방법이 필요했다. 나는 그림자처럼 아기 붙어 앉았다. 오른손으로 조심스레 책을 붙들었, 한쪽을 읽고 나면 다음에 넘겨야 할 책장 하나만 살짝 들뜨게 하고, 나머지 책장은 눌러 았다. 그렇게 하면 아기 손은 늘 들떠있는 한 장의 책장만 닿았다. 아기는 손에 잡히는 대로 넘겼을 뿐인데, 결과는 엄마의 의도대로 다. 그렇게 하면 아기는 내가 도와줬다는 사실을 모른 채 한 장도 빠짐없이 책을 을 수 있었. 아기는 혼자서 해낸 것처럼 참 잘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라는 게

누군가 살짝 밀어 올린

책장의 한 갈피를 붙드는 것처럼

간단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돌잡이 아기가 책장을 넘기듯,

그렇게 인생의 한 장을 넘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난번 서점에 갔다가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예쁜 컬러링 북 구경했다. 펼쳐보니 왼쪽에는 완성된 그림이 온전히 채색되어 있었고, 오른쪽에는 밑그림만 까맣게 인쇄되어 있었다. 누군가 그 책을 사게 되면, 왼쪽 그림 흉내 내어 오른쪽 밑그림에 열심히 붓질을 하겠다 싶었다. 그림을 그릴 줄 몰라도, 예쁜 색을 고르는 안목이 없어도 괜찮았다. 누구든 여러 장의 수채화를 완성할 수 있었고, 실력 있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취할 수 있었다.



나는 한 권의 책을 들추며 덩달아 들춰진 어른의 마음을 본 것 같았다. 거기엔 그리움 같은 게 담겨 있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완벽할 수 있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그때 우리의 이름은 '어린이'였다. 힘들면 도와달라고, 아주 쉽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 받는다는 것은 당연해서 사양할 필요가 없었다. 어떤 땐 도움을 구하기 전에, 도움이 알아서 자신을 찾아왔다. 혼자 탄 자전거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누군가 뒤에서 붙들고 있었. 덕분에 넘어지지 않았고, 늘 안전했다.



어른을 위한 컬러링 북이 유행하는 건, 지금까지 세상이 어른에게 얼마나 다정하지 않았는지 보여주는 것 같다. 성공할 수 있는 일의 가짓수가 터무니없이 적으면, 실패할 가능성이 적은 성취를 갈구하게 . 소확행, 즉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는 이유도 다른 게 아닐 것이다. 사탕 맛 모르는 아이에게 "100점 맞으면 사탕 줄게."라 하는 세상 신물 나면, 차라리 주머니에 있는 동전을 털어서 사탕을 직접 사 먹는 게 낫겠다 싶은 거다.



마지막 1개의 퍼즐을 끼워 넣는 찰나를 위해 999개의 퍼즐을 맞춰 하는 현실. 도미노 하나를 쓰러뜨리는 마지막을 위해 수천 개의 도미노세워 하는 현실. 끝까지 못하면, '집합' 단원만 새까맣게 손때가 묻은 수학의 정석 책 되는 현실. 전진하고 있을지라도 속도가 너무 느리면, 그 속도에 질려서 주저앉고 싶어 지는 현실. 그런 일들을 생각하면 세상의 모든 엄마를 대신해서 사과라도 하고 싶어 진다. 이런 험한 곳에 몰아넣고 혼자 살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실 우리는 털끝도 상처 받지 않고 곱게 커야 할 누군가의 아들이자 딸이었다. 엄마가 있거나, 엄마가 있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직 애송이, 철부지, 어린애로 불릴 자격이 있다. 알고 보면 자기도 도움 없이 혼자 해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걸 알게 된다면, 계속 '어린 이'여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어린 이'인 자기 자신에게 조금 관대해지면 어떨까. 가끔은 누군가가 내민 손을 잡아도 괜찮다고, 아기처럼 엉엉 울어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엄마"라는 말속의 담긴 다정함에 빌어 이렇게 말할 용기를 내본다. 그 많고 많은 세상 사람 중에서 내 편이 하나쯤은 있는 것처럼, 이 많고 많은 날들 속에서 내게도 친절한 날이 하루쯤은 있을 거라고.



그날엔 

삼시세끼 차려진 집밥을 먹는 아이처럼 

다 차려진 밥상 앞에 숟가락만 가지고 와

실컷 배부르고 

당연한 듯 행복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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