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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이 Jul 15. 2019

세상에 옳은 온도란 없다

너의 온도를 납득한다는 것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아기가 생각하는 쾌적한 온도와

엄마가 생각하는 쾌적한 온도는 달랐다.

문제는 그 불일치에서 시작되었다.


 

아기발가벗겨 놓으면 항상 도망 다녔다. 그런 아기 감기라도 걸릴까 봐 걱정인 엄마는 날마 추격이었다. 하루 중 우리가 가장 격렬하게 맞서는 시간은 목욕이 끝난 후였다. 미리 수건으로 감싸도, 욕실 문을 나서면 아기는 수건 사이를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머리칼 끝에 맺힌 물방울을 바닥에 뚝뚝 떨어졌고, 젖은 발바닥으로 내딛는 거실 바닥은 금방 넘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듯 미끄러워 보였다.



몸에 달라붙어 있던 수분이 증발하면 한기가 느껴질 게 뻔했다. 아직 물기가 남아있을 아기의 머리카락, 귓바퀴, 목, 겨드랑이 마음에 걸렸다. 그걸 닦 '미션'을 마쳐야, '기저귀 입히기', '옷 입히기', '로션 바르기'와 같은 다음 단의 '스테이지'에 진입할 수 있었다. 시간을 끌고 있을 새가 없었다. 나는 나무 사이를 활공하는 한 마리의 날다람쥐처럼 커다란 수건을 세로로 길게 펼친 채 필사적으로 아기를 쫓았다.



사실 날다람쥐 비유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귀엽게 표현하고픈 개인적 소망 투영다. 실상 아기가 보는 엄마의 모습은 날개를 펼치고, 송곳니를 드러내며 자신을 습격하는 흡혈박쥐였을지 다. 피를 내는 게 아니라, 아기의 온도를 탐내는 것만 다를 뿐.








달아 아기 이부자리 종착지로 삼았다. 아기는 시원하고 폭신한 곳에 몸을 던지고, 산뜻한 이불 감촉을 느끼며 뒹굴거렸다. 물론 그 모습은 예뻤다. 구름 위 노니는 옛 성화 아기 천사 다를  없었다. 이불 위 축축한 물자국으로 무수한 구름 문양 찍다. 하지만 엄마는 그 평화로움을 그냥 내버려 두질 못했다. 아기를 붙잡아 머리카락, 귓바퀴, 목, 겨드랑이 듯이 닦았다. 아기는 그런 엄마의 집요함이 성가셔서 몸부림다.



 서늘한 환경에서 키워야 한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의사들은 아기가 좋아하는 온도를 숫자로 알려주었다. 숫자는 아주 명백하고 객관적인 도구였지만, 나 온 집안을 시베리아로 만들 것 같은 그 온도를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언젠가부터 벽에 붙은 온습도계보다는 느낌에 의지해 온도를 조절하기 시작했다. '아기는 서늘한 환경에서 키워야 한다'라는 문장에서 '서늘함'은 '약간'의 서늘함을 일컫는 것일 거라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약간'도 어느 정도의 '약간'인지도 재량으로 정했다.



내가 정한 온도가 옳을 거란 확신의 근거는 또 있었다. 봄부터 흐르기 시작한 아기의 콧물은 여름이 다 되도록 멎지 않았다. 감기에 걸리게 하는 수많은 변인을 파악할 수 없다면, '실내 온도'라는 통제 가능한 변인만 지켜낼 작정이었다. '수건으로 물기 닦기' 후, 바로 착수되는 '옷 입기'엄마가 정한 온도를 사수하기 위한 미션이었다. 아기에겐 선택사항일지 몰라도, 엄마에게 옷은  필수이자 의무사항이었다. 



"이제 옷 입자."



의무라는  일종의 완장 같아서, 의무를 행사할 땐 당당하고 근엄한 목소리 . 하지만 아기는 엄마 목소리 낮고 굵 정도 별로 관심 없었다. 이내 추격전에 이어 입히려는 자와 입지 않으려는 자의 몸싸움 벌어졌. 전편보다 액션이  격렬했다.





엄마가 옷을 들고 다가가면 아기는 머리에 힘을 주어 뒤통수를 베개에 바짝 붙였다. 엄마가 목에 티셔츠를 거는 것을 방해하려는 동작이었다, 간신히 티셔츠가 목에 걸면 아기는 앞으로 바짝 드러눕든지, 뒤로 바짝 드러누워 팔을 끼우는 다음 작업을 하지 못하게 했다. 기저귀를 입을 때는 허공에 연신 발길질을 해서 다리를 붙잡지 못하게 했다. 엄마가 한쪽 발에 기저귀를 기껏 걸어 놓아도, 이어진 발길질 기저귀를 공중으로 날려 버렸다.



"옷 입어. 옷 다 입으면, 시원하게 에어컨 틀어줄게."



호기 좋은 시작달리, 엄마결국 애원하는 처지가 . 하지만 아기에게  입으면 에어컨을 틀어주겠다는 말은 아무 효력이 없다. 그 정도 수준의 말을 이해하고 협조하기에는 아직 다. 하지만 엄마는 이렇게 말해서라도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고 싶었다. 덥고 갑갑한 옷을 입히는 엄마이지만, 에어컨 바람으로 금방 보상해주는 엄마니까, 아주 나쁜 엄마 아니 않냐고 변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자기 손과 팔에 상당한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고, 진짜 나쁜 엄마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섬찟해졌다. 순간 아기를 놓아 버렸다.



"그래, 조금 있다가 다시 입자."



힘을 어느 정도만 써야 강압적인 엄마 되기를 할 수 있는 건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폭력의 기준이란 정하기 나름이라, 엄마는 이미 여러 차례 폭력을 행사해왔는지도 몰랐다. 사실 이런 종류의 위험은 주변에서 흔다. 부모와 자식 사이나, 교사와 제자 사이에서, 또는 이 이상 관계 속에서 상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발생하곤 했. 나이가 많고, 학식, 권위가 있사람이  선의의 행동이 한 끗 차이로 억지와 강요가 되었다. 빠지기 쉬운 함정에서 나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엄마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보기로 했다.



"사람은 왜 옷을 입을까?"



원시인들이 나뭇잎이나 동물의 가죽을 이용해서 옷을 만들어 입었던 이유는, 추위나 더위를 피해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였. 태초의 야생성을 그대로 간직한 아기 마찬가지였다. 아기가 을 입었을 때  따뜻함과 쾌적함을 느낀다면, 발적으로 옷을 입고 싶게 될 거였다.



특수교육 이론에 있는 '자연적 강화'라는 개념 각났다. 강화란 잘한 일을 계속 잘하게 하기 위해 제공되는 것이. 그런데 강화로 흔히 사용하는 칭찬이나 사탕이나 과자 같은  효과가 없을 때가 다. 상을 주지 않는 상황이 되면 상 받을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일 했을 때 항상 뒤르는 결과가 자신에게 이득이면, 이야기는 달라다. 요리를 하 자기가 먹게 된다면, 요리를 맛있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지니까.



칭찬도 사탕이나 과자도 필요. 노래를 개사해서 부르거나, 인형으로 역할 놀이를 해서 '옷 입기'를 놀이처럼 꾸밀 필요도 없다. TV를 틀어 아기가 만화에 현혹된 틈을 노릴 필요도 없다. '옷 입기'의 결과로 따뜻함과 쾌적함 뒤따르면 됐다. 이 논리에 따르면 아기 약간 춥게 해야 했다. 옷을 입고 에어컨을 켜주는 게 아니라, 에어컨을 먼저 켜고 옷을 입혀야 하는 게 맞았다. 



하지 

세상에 어떤 엄마가 

아기에게 추위를 제공하는 것에

쉽게 동의할 수 있단 말인가. 



엄마는 깨달았다. 누군가를 변화시킨다는 건, 자신을 저버리는 정도나 되어야 가능하다는 걸. 벌거벗은 아기에게 에어컨을 틀어주는 엄마처럼 스스로 납득이 안 되는 일까지 해낼 용기가 있어야 했다. 때로는 개인의 신념, 체면과 관습을 버려야 하고, 때로는 상식에서 벗어난 선택을 해야 했다. 물이 자신의 온도에서 벗어나야, 액체라는 모습을 버리고 다른  되는 것처럼. 변하고 싶다면 0도 아니면 100도. 이 낭떠러지처럼 아찔 두 개의 숫자 앞에 몸을 던져야 했다.





이토록 온도란 변하기가 힘든 거였다. 그리고 자신과 타인의 온도가 다르다는 건 인정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엄마는 방법을 알고도 실천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실내온도가 낮아지면 아기의 신변 위험해질까 봐, 차라리 매일 아기와 싸우는 길을 택했다. 하지만 싸우는 게 아기의 신변을 더 위태롭게 하는 거라는 생각에 다다랐 때, 결국 타협하기로 했다. 마침 날씨가 무더워져서, 엄마의 마음도 조금 누그러졌다.



엄마에겐 약간은 낮은 온도, 아기에겐 약간은 높은 온도 정해졌. 엄마는 이불 위에 뒹구는 나체의 아기를 보고도 내버려 두는 훈련을 시작했다. 견디기 힘들 땐 책 몇 권을 읽어주고 노래도 불러주며 시간이 가길 기다렸다. 껐다 켜기를 반복하긴 했지만 에어컨약하게 틀어다. 이제는 입혀도 되는 시간이 됐다고 생각하고 다가가면, 아기는 여전히 '아직요.'라는 사인을 보냈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엄마에게  시간이 아기에겐  잠깐의 시간이 생각하기로 했다.



이 정도면 엄마가 많이 .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말 또 증명된 것이다. 하지만 졌다고 생각 순간, 아주 진 것은 아님을 깨달았다. 아기는 선선한 공기를 마음껏 만끽한 후 엄마의 손길에 자기를 순순히 맡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날은 아기가 기저귀 스스로 발을 집어넣는 극적인 광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매일 지겹도록 반복된 협상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 절차였던 것이다. 서로 다른 온도를 좋아한다 해도, 우리는 결국 한 온도 속에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아기 바꾸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온도 바꾸기로 한 건 잘한 일이었다. 엄마는 자신이 조금 발전했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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