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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이 Apr 01. 2019

겪어보기 전엔 괜찮다고 할 수 없는 일들

파스, 샴푸, 그리고 뒷쿵



직접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들이 있다.

직접 해보지 않으면,

누군가를 안고 토닥거리며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이

새빨간 거짓말이 될 수 는 일들이.






"안돼! 그건 먹으면 안 돼!"



아기 입에 물려있던 하얀색 용기를 황급히 잡아 뺐다. 그건 맨소래담, 근육통 등에 소염 진통제로 쓰는 액상 파스였다. 보자마자 빼긴 했지만, 아기는 이미 용기의 주둥이를 쪽쪽 빤 뒤였다. 마개는 닫혀 있었지만, 마개 부분에 소량의 약이 묻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파스'라는 물건은 아기에게 초면이었다. 서랍 속에 숨겨두었던 것을 쓰려고 선반 위에 잠깐 올려놓았는데, 까치발을 한 아기가 손을 뻗어 끌어내린 것이다. 파스 용기의 우윳빛 자태가 아기에게 꽤나 매혹적이었던 모양이었다.



아기 표정을 먼저 살폈다. 당황한 엄마와는 달리 아기 얼굴은 밝았다. 새로운 시도의 성공을 득의양양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미 늦었다는 걸 알지만, 손수건으로 아기 입 속을 닦다. 약 용기를 빨아도 울지 않던 아기는 손수건이 입으로 들어오니 그제야 울기 시작했다. 아기는 약보다 엄마를 더 위험물로 취급하는 것 같았다.



인터넷에 글을 쓰는 현직 의사들은 파스를 소량 먹었을 때 약을 닦아낸 뒤 물이나 우유를 많이 먹이고 경과를 지켜보라고 했다. 열이 나거나, 구토를 하는 등의 이상 증세는 없어서, 병원까지 갈 필요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정말 괜찮은 건지 알 방법은 없었다. 애먼 부위에 파 따갑고 화끈거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독한 파스가 연한 구강 점막에 닿았는데, 정말 괜찮을까.



"먹어볼까? 조금만?"



이상한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아기가 빨았던 용기의 주둥를 살짝 핥아보았다. 아기 입이 훑고 지나간 후라 그런지,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이번엔 파스를 짜서 손에 바른 후 살짝 에 대보았다. 혀 끝에 느껴지는 화한 느낌 민트맛 같기도 하고, 치약 맛 같기도 했다. 파스의 성분 중에 하나인 멘톨은, 알고 보니 화하고 매운맛이 나게 하는 민트의 성분이었다. 이런 맛이라면 아기도 그리 불쾌하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휴우, 널 키우다 보니 엄마가 이런 것도 먹어보는구나. "



물로 입을 헹구며 생각했다. 누가 보면 내가 한 짓이 얼마나 바보 같고 미련 맞아 보일까.








하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아기 샴푸를 고를 때도 난 아기가 겪 일을 미리 체험해는 바보짓을 했다.



해님이는 샴푸 캡을 쓰지 않았다. 이마에 꽉 끼는 게 답답했는지, 씌우면 벗겨내버려서 결국 시도 자체를 포기해야 했다. 비눗물이 눈에 들어가지 않게 하려면, 눕혀놓고 머리를 감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요령이 부족해서 그런지, 아기가 몸부림을 쳐서 그런지, 비눗물은 아기 얼굴 위로 자꾸 흘러내렸다. 찡그리는 아기 표정을 보니 비눗물눈에 들어가도 덜 따가운 샴푸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극이 적다는 상품평을 참고하여 브랜드가 다른 두 개의 샴푸다. 용기의 겉면만 봐서는 어떤 게 눈이  따가운 샴푸인지 알 수 없었다. 아기에게 사용해보면서 판단할 수도 있겠지만, 난 아기를 조금이라도 덜 울리고 싶었다. 아기를 실험 대상으로 삼지 않으려면 나 자신이 실험실의 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마에 샴푸 거품을 조금 묻히고 정수리에서부터 물을 흘려보냈다. 얼굴 위로 흐르는 물의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하지만 비눗물이라고 생각하니 쉽게 눈이 떠지지 않았다. 머리 감을 때 우연히 눈에 들어가도 대수롭지  비눗물 눈에 넣을 작정을 하고 나니 꽤 두려운 액체였다. 용기를 내서 살며시 눈을 떠 봤다. 심한 이물감이 느껴지더니, 두 눈이 불이 난 것처럼 뜨끈해졌다. 바로 눈을 씻어내지 않으면 못 견딜 정도로 따가웠다. 눈이 괜찮아지길 기다렸다가 다른 샴푸로도 같은 작업을 수행했다. 해님이의 샴푸 결국 엄마의 몸을 던지는 실험으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실험실의 쥐도 모든 실험에 참여할 수 없었다.

아무리 마음 단단히 작정한 쥐라 해도

목숨을 담보하는 실험 앞에서는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시도하려 해도 시도할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아기의 '뒷쿵'(뒤로 "쿵"하고 넘어지는 것)이었다. 걸음마를 막 시작한 아기는 세상에 발을 내딛고 싶은 조급한 마음 때문에 자주 넘어졌다. 거실과 부엌 전체에 매트깔았고, 침실 바닥에는 상시 이불을 깔았다. 이렇게 온 집 안이 대비를 하고 있어도, 아기는 매트 없는 사각지대를 용케 찾아 꼭 거기서 넘어졌다. 



아기가 넘어질 때 머리가 먼저 바닥에 닿으면 "쿵"하는 큰 소리가 났다. 그럴 때마다 내 심장도 쿵 내려앉았고, 동시에 뇌진탕이나 뇌출혈 같은 무시무시한 단어들이 떠올다. 눈에 초점이 없거나 구토하는 경우만 아니면 괜찮다고 하지만, 엄마의 마음은 괜찮을 리 없었다. 심하게 아팠을 거였다. 하지만 그 아픔의 정도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직접 뒤로 넘어져 보기로 했다.



서서할 용기가 없어서 앉아서 했다. 맨바닥에서 할 용기가 없어서 매트 위에서 했다. 그런데도 겁이 났다. 넘어지면 아플 것을 미리 예상한 뒷목은 일찌감치 뻣뻣해졌고, 넘어지는 속도를 조금이라도 줄이려 아랫배에는 묵직한 힘이 들어갔다. 온몸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예정된 사고를 대비하여 몸을 보호했 것이다. 의도한 뒷쿵은 아무리 시도해 봐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몸 사리는 슬랩스틱 코미디언이 하는 시시 몸개그였다.



나는 엄마이기 이전에 뒷쿵두려워하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그걸 깨달아서인지 머릿속에 음모론들이 스멀거리기 시작했다. 자식이 아프면 부모도 아프다는 말도 사실 거짓말 아닐까. 혹시 자식 대신 아플 방법이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대신 아플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신이 정말 대신 아플 기회를 준다면, 그 앞에서 1초도 머뭇거리지 않을 수 있을까.



사실 아기가 아프다고 내가 아픈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기가 열이 나면 체온을 확인하고 해열제를 주는 건 내 몫이라도, 앓는 건 아기의 몫이었다. 아기 상처 소독하고 반창고를 붙여 주는 건 내 몫이었지만, 따가워하고 쓰라려하는 건 아기의 몫이었다.



그래도 임신했을 땐, 아기와 나는 고통을 공유하는  같았다. 갑작스러운 큰 소리내 심장도 쿵 내려앉았지만, 태아도 깜짝 놀라 발길질을 했다. 위험이 느껴지면 나는 배부터 얼른 감싸 안았다. 그건 나를 보호하는 행동임에 동시에 태아를 보호하는 행동이었다. 임신 기간에 나는 태반이 자궁 입구를 막는 전치태반 상태였다. 의사는 출산 시 출혈이 심하면 나와 아기가 위험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였을까. 당시 내 목숨은 아기의 목숨 같았고, 아기의 목숨은 내 목숨 같았다.



하지만 아기가 몸에서 빠져나간 순간, 우리는 한 몸에서 분리된 두 개의 몸이 되었고, 고통을 함께 느끼던 우리는 자기 고통은 자기만 아는 고독한 존재가 되었다. 다시 하나가 될 수 없는 둘이기에 우리는 서로가 괜찮은지, 괜찮지 않은지 영원히 판단할 수 없게 됐다. 



엄마가 길바닥에 넘어진 아기를 일으켜 흙을 탁탁 털어주며 정말로 괜찮은지 진위를 알 수 없는 "괜찮아."라는 말을 하는 이유는, 그렇게라도 아는 체하지 않으면 외로워질 것 같아서일지 모른다. 남의 고통에 대해 쉽게 단정 짓고 재단한 후 어쭙잖은 위로를 건네는 이유도 그렇다. 파스를 먹고, 비눗물을 눈에 넣어보는 바보짓은 할 수 있어도, 대신 다치고, 대신 아픈 것은 해줄 수 없는 타인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인 아기는 생각보다 강하다는 점이다. 친정 엄마는 아기가 넘어질 때마다 "삼신할매가 도와줘서 안 다쳤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아이를 점지해 것으로도 모자라, 아기가 위험해지는 순간마다 찾아와 다치지 않게 도와준다는 삼신할매. 하지만 그런 신령한 힘은 사실 삼신할매가 가진 것이 아니라, 갓 태어난 아기가 처음부터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기가 건강하고 꿋꿋하게 살아가며, 기어이 자신의 강함을 증명할 라 믿고 싶다. 아기 홀로 서는 세상이 누구라도 홀로 설 수 있는 세상인 거라고, 언젠가 아기는 이 세상의 대표처럼 모두에게 말해주었으면 한다. 그게 이 위험하고 겁나는 세상에서 나와 영원히 분리된 영혼에게 기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희망다. 그리고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부모가 아이 대신 아무것도 해줄 수 없게 만든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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