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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lon Jun 08. 2020

재즈, 인종주의라는 미신과 싸우며

장르 인사이드 #재즈

"백인은 흑인에게 범한 잘못을 인식하고, 흑인을 위해 일하고, 흑인을 위해 아파하고, 흑인을 위해 싸우고, 심지어 흑인을 위해 죽을 수는 있을지언정, 흑인을 향한 은밀한 경멸은 절대로 없애지 못한다." - Edward W. Blyden (1832~1912)


글ㅣ황덕호 (음악평론가, KBS클래식FM Jazz수첩 진행)


이 글을 쓰고 있는 6월 6일 현충일, 저는 "Black Lives Matter(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라는 두 블록 길이의 대형 글씨가 미국 워싱턴 DC 16번 스트리트에 공식적으로 쓰이게 됐다는 소식을 방금 접했습니다. 이 길은 직선으로 백악관을 향해 이어진 길로, 지난 5월 25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경찰의 폭력에 목숨을 잃은 George Floyd의 죽음에 항의하면서 시민들의 요구로 이뤄졌다는 것을 여러분은 쉽게 짐작하실 겁니다. 아울러 워싱턴 DC는 공식적으로 이 거리를 "Black Lives Matter Plaza"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명명했다고 합니다.

현재, 한 평범한 시민이었던 Floyd를 떠나게 한 경찰의 폭력을 두둔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분노했고, 그래서 인종을 불문하고 수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소셜 미디어에 분노에 찬 목소리들을 올려놓았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이 발생한 후 아프리카 리베리아 공화국의 사상가 Blyden의 저 글귀는 자꾸 저의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두 흑인 인권 운동가 Malcolm X(1965년)와 Martin Luther King 목사(1968년)가 총격으로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왜 아프리카계 사람들의 인권은 조금의 진전도 없는 것일까요? 왜 여전히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20세기 민주주의의 상징임을 자처했던 나라 미국에서 매해 공권력에 의해 목숨을 잃고 있을까요. 


Blyden이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심지어 우리는 흑인들과 역사적으로 직접적인 접촉이 거의 없었던 아시아인이면서) 아프리카계 사람의 동등한 인권을 믿고 지지하지만, 의식 저 밑바닥에는 그들과 우리가 결코 동등하지 않다는, 인종 간에는 분명히 서열이 있다는 인종주의에 물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 미세한 의식이 잘못된 방향으로 발전한다면 결국에는 "인종혐오"가 되어 지금과 같은 비극적인 사건을 만든 것은 아닌지 자문하게 됩니다.

먼저 음악 두 곡을 듣겠습니다. 먼저 Fats Waller의 1929년 곡 'Black & Blue'입니다. 뮤지컬 [Hot Chocolate]을 위해서 쓴 이 곡을 훗날 Waller는 연주곡으로만 녹음을 남겼는데 추측하건대 당시 보수적인 메이저 음반사였던 빅터 레코드가 이 곡의 신랄한 가사를 탐탁지 않게 생각해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내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피부에 있어/ 내가 어쨌길래 나는 이토록 검고 우울한가."라는 이 노랫말은 이후 다른 가수들에 의해 녹음되었고 특히 뮤지컬에 출연했던 Louis Armstrong은 이 곡을 그 누구보다 절절한 감정으로 부릅니다. 아울러 아프리카계 사람들을 향한 미국 남부의 공공연한 인종폭력을 정면에서 고발한 Billie Holiday의 1939년 노래 'Strange Fruit'은 오늘날까지도 그 침통함이 전해지는 시대의 명곡입니다.


Louis Armstrong & His All-Stars - (What Did I Do To Be So) Black And Blue

Billie Holiday - Strange Fruit


인종주의란 비윤리적인 사고이기 이전에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는, 인간 사고의 악습이자 16세기 이래로 유럽 제국주의가 강화시킨 일종의 편견이자 미신입니다. 이 미신의 뿌리는 너무 깊기 때문에, 심지어 아프리카계 사람들에 의해 발생한 음악 재즈를 매우 좋아한다는 재즈팬들 가운데서도 인종주의에 젖어있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런 분들의 경우 재즈가 이면에서 인종주의 때문에 겪어왔던 고통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편입니다.


재즈란 음악의 일종이고, 음악이란 늘 사람들을 즐겁고 유쾌하게 해주려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재즈 역시 인종주의에 의한 고통을 대부분 숨겨왔고 아주 가끔, 어쩌다가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Billie Holiday와 Roy Eldridge는 1930년대 가장 뛰어난 재즈 음악인들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문화에는 어떤 집단 내에 백인들과 다른 인종의 사람이 섞여 있는 것을 몹시 불쾌하게 생각하는 인종주의가 팽배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클라리넷 주자 Artie Shaw와 드러머 Gene Krupa는 모두 피부 색깔과 상관없이 실력만 있다면 흑인 음악인들을 자신의 빅밴드에 기용했습니다. Billie Holiday는 1938년 Artie Shaw 오케스트라에서 노래를 불렀고, Roy Eldridge는 1941년 Gene Krupa와 '45년 Artie Shaw와 함께 연주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그 뛰어난 음악에도 불구하고 그들 간의 협력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특히 그 문제는 미국 남부에서 불거졌는데, 백인 밴드 안에 흑인 단원이 있는 것을 보고 쏟아내는 백인 관중들의 욕설, 출입 제한 등의 사건들은 Billie와 Roy 모두에게 큰 정신적 고통을 줬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경험들은 이 뛰어난 음악인들에게 모두 상처로 남았습니다.


Artie Shaw & His Orchestra, Billie Holiday - Any Old Time

Anita O`day - Let Me Off Uptown

Artie Shaw - Little Jazz


1865년 남북전쟁의 결과로 미국에서의 노예제는 폐지되었지만 몇 백 년의 인종주의는 괴물처럼 미국 내부에 똬리를 틀고 있고 현재도 그렇습니다. 전쟁 직후 미국 남부는 백인이 사용하는 모든 공간을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들이 절대 사용할 수 없게 만드는 인종 분리 법안을 통과시켰고 북부는 법률로서 흑인을 차별하지는 않았지만 비가시적인 문화로서 흑인들을 따돌렸습니다. 심지어 모든 음악도 백인을 위한 음악과 흑인을 음악이 명백히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최소한 음악에서 그 장벽을 허문 최초의 인물은 Nat King Cole이었습니다. 아프리카계 음악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탁월한 목소리와 연주 실력 때문에 Nat Cole은 1940년대 후반부터 모든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 일부 백인들의 그에 대한 공격은 위협적이다 못해 폭력적이었습니다. LA에 있던 그의 집 앞에서는 늘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시위가 벌어졌고 1956년 앨라배마주 버밍햄 공연 때는 세 명의 KKK단원들이 납치를 시도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다행히도 이 사건은 미수로 그쳤지만 이후 Nat King Cole은 남부에서 다시는 공연 할 수 없었습니다.

빅스타였던 Nat King Cole의 경우가 그럴진대, 흑인 음악인이 무명시절에 경험해야 했던 인종폭력은 너무나도 빈번했습니다. 비밥 피아노의 기초를 완성한 Bud Powell은 1944년 스무 살의 나이로 Cootie Williams의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던 시절, 필라델피아에서 경찰의 곤봉에 머리를 맞아 이후 평생에 걸쳐 정신병 그리고 약물과 싸워야 하는 불행한 삶을 살게 됩니다. 만약 그 폭력만 없었더라도 Bud Powell은 현재보다 더 많은 걸작들을 만들어 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경찰의 폭력은 신인시절의 Bud Powell만이 당했던 것이 아닙니다. 1959년 당시 명실상부한 재즈계의 리더로 꼽혔던 Miles Davis도 공연 중간 휴식 시간에 우연히 마주친 뉴욕 경찰이 휘두른 곤봉에 머리가 심하게 깨지는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1959년 8월의 일로, 앨범 [Kind of Blue]의 녹음이 끝난 지 4개월 뒤의 일이었지만, 음악사의 걸작을 지금 막 탄생시킨 거장에게도 미국의 인종폭력은 예외가 없었습니다.


Nat King Cole - Route 66, (Get Your Kicks On)

Bud Powell - Hallucinations

Miles Davis - All Blues


1955년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시작된 흑인들의 버스승차 거부로 시작된 흑인 인권 운동은 1960년대가 끝날 때까지 미국 전역에 타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기운은 재즈에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당시 냉전 시기 미국의 문화홍보를 위해 미국 국무성에서 후원했던 Dizzy Gillespie와 그의 오케스트라는 Dizzy의 대표곡 'Manteca'를 연주할 때 서주 부분에서 미국의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1957년부터 이 노래에서 "난 다시는 조지아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I'll Never Go Back To Georgia)"를 합창하기 시작했고 드러머 Max Roach는 노스캐롤라이나주 흑인 대학생들이 시작한 백인 공간 "입장 Sit-In" 시위를 지지하면서 1960년 [We Insist!: Freedom Now Suite!]를 발표했습니다. 아울러 James Brown이 1968년에 불렀던 'Say It Loud, I'm Black and I'm Proud'는 즉각 알토 색소포니스트 Lou Donaldson에 의해 연주 되었습니다.


Dizzy Gillespie - Manteca (Live At Newport Jazz Festival, 1957)

Max Roach - Freedom Day

Lou Donaldson - Say It Loud (I`m Black And I`m Proud)


1961년 3월 15일 Ray Charles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 조지아주 어거스타의 벨 오디토리움에서 공연을 가질 예정이었습니다. 1960년 그는 명곡 'Georgia on My Mind'를 발표했고 그 곡을 자신의 고향에서 부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공연장에 들어가기 직전 Ray는 한 학생의 일인 시위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때 Ray Charles는 이 공연장의 좌석 중에서 흑인을 위한 좌석은 2층 발코니석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Ray Charles는 거액의 위약금을 지불하면서 결국 그 공연을 거부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인내심을 갖고 주법(主法)의 개정을 끈질기게 요구했고 결국 1963년 10월 인종 간의 좌석 구분을 없앤 채 같은 장소에서 공연을 갖게 됩니다. 1959년 Sam Cooke의 노래대로, 그리고 그 노래의 감명을 받은 King Curtis를 비롯한 수 많은 연주자들의 연주대로 천천히 "변화가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변화는 너무도 느리고 때로는 후퇴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의 시간은 너무도 길었습니다. 그것은 일부 백인들의 폭력뿐만이 아니라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인간 악습과의 싸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George Floyd가 세상을 떠나기 이전 재즈 색소포니스트 Jesse Davis와 Jimmy Greene이 지난 2009년과 2012년에 인종주의자들의 총기에 의해 사랑하는 딸을 잃은 사건은 지금 현재 미국의 현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음악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먼저 떠나간 딸들을 생각하며 음악으로 인종차별이 없는 세상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음악이야말로 그 절실한 세상을 가장 선명하게 이야기해 줄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인종차별의 문제가 단지 어느 지역의, 특정 인종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우리도 무의식 중에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인간 전체의 문제라는 것을 음악은 절실하게 이야기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초기의 폭력적 양상에서 벗어나 지금의 운동이 음악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진전되고 있는 것은 결국 우리의 목표는 더욱 현명하고 합리적이며 아름다운 인간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Ray Charles - Georgia on My Mind

King Curtis - A Change Is Gonna Come

Jesse Davis - Pray Thee Be Free

Jimmy Greene - Saludos / Come Thou Almighty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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