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인사이드 #재즈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8월 29일. 100년 전 이날, 미국 캔자스주 캔자스시티에서는 비밥의 창시자, 모던재즈의 설계자, Charlie Parker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만약 재즈 연주자들과 팬들이 모여서 사는 나라 혹은 마을(Jazzville!)이 있다면 아마도 8월 29일은 성인(聖人)을 기리는 명절이 되었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아무튼 저는 오늘 먼저 이 말을 하고 싶습니다. "100번째 생일을 축하해요, Bird!"
Charlie Parker가 하늘의 새처럼 높이 날아올랐던 1949년, 현악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명곡들을 듣겠습니다. 오케스트라 편곡과 지휘에는 Jimmy Caroll입니다.
Charlie Parker - Charlie Parker With Strings (Deluxe Edition)
글ㅣ황덕호 (음악평론가)
대략적으로 지난 75년간 Charlie Parker에 대한 찬사들은 차고도 넘쳤습니다. 1955년, 서른다섯의 젊은 나이로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팬들은 그의 죽음을 받아드릴 수 없었기에 "Bird는 살아있다!"라는 글귀를 낙서처럼 골목 여기저기에 써놓았고 앞서 표현한 것처럼 평론가들은 그를 "비밥의 창시자", "모던재즈의 설계자"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팬들은 그의 비상(飛翔)하는 알토 소리를 들으며 그의 별명, Bird 혹은 야드Bird(Yard Bird)를 늘 떠올립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특히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새로운 음악팬들은 그에 대한 찬사가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내가 듣기엔 그의 색소폰 연주는 평범하고 심심한데 뭐가 그렇게 위대하다는 건가." "그 시절의 녹음들은 도무지 답답해서 못 들어주겠어." "대부분 3분밖에 되지 않는 그의 연주를 오늘날까지도 그토록 예찬하기엔 너무 진부한 게 아닌가?" "Bird보다는 역시 John Coltrane, Sonny Rollins, Wayne Shorter, Branford Marsalis지. Bird는 그 옛날에 재즈 발전에 기여했다, 뭐 그 정도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아마도 젊은 재즈팬들은 이런 생각들을 많이 하실 것이고 이러한 생각들은 모두 일리가 있는 의견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저는 연주자를 제외하고는 Charlie Parker를 애청하는 재즈팬들을 거의 본 적이 없으며 그의 음악에 헌사를 바친 애정 어린 국내 평론가의 글도 읽은 기억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재즈팬, 재즈 평론이 크게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매우 당연합니다. 세월은 흐르고 사람들의 관심은 계속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이 순리이니까요.
밴드리더로서 Charlie Parker가 1945년부터 시작한 녹음들은 모두 78회전 음반, 소위 SP 음반 시대의 녹음들입니다. Thomas Edison이 발명한 녹음 재생 기술을 Emil Berlin이 원반 형태로 개발해서 탄생한 이 음반은 1897년에 탄생한 이래 1948년 바이닐 LP가 등장할 때까지 50년간 음반의 형식을 독점했던 포맷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음반 형태를 지배했던 만큼 기술발전은 더뎠는데 1925년 전기 마이크의 탄생으로 녹음기술의 향상이 있었을 뿐 그 후로 20년 뒤 Charlie Parker가 등장할 때까지 10인치(지름 25cm) 크기에 분당 78회전 하는 이 음반의 표준과 기술은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1925년 Louis Armstrong의 Hot Five가 음반을 발표했던 때와 20년 뒤 Charlie Parker가 첫 리더 녹음을 시도했을 때의 상황은 거의 동일했습니다.
그래서 한 곡은 음반 한 면을 차지했고 곡의 길이는 78회전 음반 한 면의 길이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3분 안팎이었습니다. 재즈 연주자는 그 3분 안에 자신의 모든 즉흥연주를 보여줘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첫 리더 녹음에서 주제도 등장하지 않고 즉흥 솔로부터 시작해, 솔로가 끝나면서 그냥 마무리되는 'Warmin' Up a Riff'는 당시 3분의 공간이 Bird에게 얼마나 숨 막히는 공간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기이한 작품입니다.
다음은 Charlie Parker가 리더로서 데뷔한 1945년 11월 26일부터 1947년 2월 26일까지, 사보이와 다이얼 레코드에서 남긴 그의 곡들입니다.
1945년, 스물다섯 살의 Charlie Parker는 비밥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Dizzy Gillespie 5중주단의 일원으로 뉴욕 재즈계를 깜짝 놀라게 합니다. 이 밴드에서 속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는 사보이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45년 11월부터 자신의 솔로 음반들을 녹음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1946년 초 Dizzy 밴드의 일원으로 서부 캘리포니아주로 투어에 나섰고 투어가 끝난 후 밴드는 모두 뉴욕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Bird만은 그의 악습이었던 약물로 인해 여러 문제를 일으켜(출연료를 미리 받고도 공연에 지각하거나 결근하는 등) 계약 완료를 위해 홀로 캘리포니아에 남게 됩니다. 그곳에서 다이얼 레코드와 별도의 녹음을 진행했던 그는(앞서 들었던 'Relaxin' at Camarillo'까지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나빠진 건강을 회복하고 불이행했던 계약을 모두 마무리한 뒤 '47년 4월 뉴욕으로 돌아와 비밥 팬들 앞에 다시 섰으며 사보이 레코드와의 녹음도 다시 진행하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날 음악팬들이 Charlie Parker 녹음에서 갖는 불만들, 다시 말해 길이가 너무 짧은 연주, 음질이 선명하지 못한 녹음들은 '47년 이후의 음반에서도 계속됩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릴 테이프를 사용한 고음질(Hi-Fi) 녹음이 등장했고, 심지어 컬럼비아 레코드는 소리 정보를 담은 그루브를 촘촘하게 만들고 분당 약 33회전 해서 음반 한 면당 재생 시간을 20 여분까지 늘릴 수 있는 새로운 매체 LP를 1948년에 개발했지만 그러한 신기술은 당시 Charlie Parker를 녹음하던 마이너 음반사였던 사보이, 다이얼과 같은 회사와는 무관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2차 세계 대전 이전의 녹음, 재생 기술을 고수하고 있었고 그래서 베이스, 드럼 등 리듬섹션의 존재감은 미미했으며 관악기들의 음색은 늘 건조했습니다.
그럼에도 당시 Charlie Parker의 녹음을 들어보면 "이런 게 뭐 중요하냐"는 식의 결기가 느껴집니다. 그는 쏟아져 나오는 악상들을 재빨리 정리해 녹음으로 담았고 그 안에서 분출하는 즉흥연주를 3분의 시간 안에 빽빽하게 채워 넣었습니다. 특히 1947년 12월 21일에 녹음한 'Klaunstance', 'Bird Gets the Worm'과 '48년 9월 24일 녹음한 'Merry Go Round'는 시대적인 제약 조건을 비집고 돌출하는 Bird의 질주가 전율을 일으키는 숨은 걸작입니다.
'40년대 Charlie Parker의 곡들은 녹음의 질과 상관없이 이후 재즈 연주자들에게 즉흥연주의 접근방식, 음색, 스타일 모든 면에서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고 그런 면에서 그의 많은 곡들은 재즈 스탠더드가 된 명곡들이었습니다. 이 리스트에 올려놓은 곡들은 재즈 연주자라면 모두가 한 번씩은 도전했던 곡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제도 제시하지 않고 오로지 즉흥연주만이 등장했던 'Klaunstance', 'Bird Gets the Worm', 'Merry Go Round'는 명곡들에 비해 덜 알려진 작품들이지만(아울러 '45년의 'Warmin' Up a Riff'도 그렇습니다) 시대의 제약을 뚫고 나온 천재적 재즈 음악가의 모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LP와 스테레오 사운드가 등장하고 수많은 재즈의 명반들이 탄생했지만 Charlie Parker가 들려줬던 과감한 솔로의 미학을 뛰어넘는 연주는 쉽게 발견되지 않습니다. 다음 곡들은 1947년 5월부터 '48년 9월까지 1년 4개월 사이에 남긴 걸작들의 행렬입니다.
'49년, 어느덧 Charlie Parker는 재즈계의 명사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해 음악 전문지 "트로놈"투표에서 그는 알토 색소폰 부문 1위를 차지했고, 그의 별명을 가지고 상호를 만든 클럽 "버드랜드"가 맨해튼 한복판에 문을 열게 된 것입니다. 그곳은 Charlie Parker를 위한 상설무대였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사보이, 다이얼과 같은 마이너 음반사와 음반을 제작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대형 음반사 머큐리 레코드 산하의 재즈 전문 레이블이었던 클레프 레코드를 운영하고 있던 프로듀서 Norman Granz는 '46년 Bird가 캘리포니아에 머물고 있던 시절부터 그를 눈여겨보고 있다가(Granz는 그가 조직한 잼세션 콘서트인 "Jazz at the Philharmonic"에 Bird를 초대했습니다) '49년 Bird와 직접 계약을 맺고 그해 3월부터 Charlie Parker 이름의 공식적인 리더 녹음을 제작하기 시작합니다(클레프 레코드는 1956년 머큐리 레코드로부터 독립해서 대표적인 재즈 음반사 버브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 시기 Charlie Parker의 녹음 사운드는 한층 발전합니다. 하지만 클레프에서의 녹음도 비슷한 시기 블루노트 레코드 혹은 프레스티지 레코드의 녹음이 하나의 기준이 된 재즈팬들에게는 여전히 불만족스럽습니다. 당시 루디 반 겔더가 엔지니어로 있던 마이너 레이블인 블루노트, 프레스티지와 녹음하기에는 Bird가 너무 커다란 별이었다는 것은 안타까운 모순, 역설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것은 기술적인 문제도 있지만 새롭게 도래한 LP라는 매체를 재즈는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Miles Davis가 앨범 [Dig]을 녹음했을 때(1951년), 혹은 Charlie Parker를 위한 무대 버드랜드에서 Art Blakey가 [A Night in Birdland]를 실황으로 녹음했을 때('53년), Bird는 음반이 갖는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Bird 팬이 이제 와서 느끼는 아쉬움일 뿐, 실상 그의 인생은 그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극심한 헤로인 중독과 과음으로 그의 건강은 심각하게 망가졌고 약물소지로 1951년 그의 카바레카드는 면허 정지가 됨으로써 그는 뉴욕시 안에서, 그러니까 그를 위해 마련된 버드랜드에서도 공연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그는 클레프에서의 LP를 오로지 동료 연주자들과의 잼세션 녹음에 적합한 매체 정도로 인식했을 뿐, 이 새로운 매체의 시대에도 그는 과거 78회전 시대와 동일한 태도로 스튜디오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3분을 전후로 한 그의 곡들은 이제 10인치 LP 한 면에 네 곡씩 들어간 것만이 유일한 변화였습니다. 앨범 전체의 컨셉같은 것은 그에게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기에는 Bird의 인생은 너무도 피폐해 있었습니다. 다음의 Charlie Parker 연주는 '49년부터 시작된 클레프에서의 스튜디오 녹음들입니다.
Charlie Parker And His Orchestra - Segment - Tune X
Charlie Parker And His Orchestra - Passport - Tune Y (Rare)
Charlie Parker And His Orchestra - Passport - Tune Z (Common)
Charlie Parker, Dizzy Gillespie - Bloomdido (Master Take)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변화에 조응하지 못했던 그의 정체(停滯)는 역설적으로 '40년대 비밥의 도발을 '50년대까지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옛동지 Dizzy Gillespie와 함께 녹음한 앨범 [Bird & Diz](1950년 6월 6일)에서 Bird는 오랜만에 호적수를 만나 네 마디씩 솔로를 주고받는 불꽃 튀는 난타전을 벌였고('Leap Frog'), 혼자 술에 취해 스튜디오에 두 시간 늦게 나타났음에도 마지막 절정의 기량을 들려줬던 '53년 7월 30일 녹음에서도 그는 8년 전에 발표했던 'Now's The Time'을 마치 방금 탄생한 음악인 것처럼 펄펄 끓는 에너지로 한 번의 테이크로 완성했습니다.
이 음악의 에너지는 비밥 그 자체이자 사라질 수 없는 재즈의 중요한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재즈는 그 이후에 더 섬세한 아름다움과 깊은 정신적 깊이를 담은 음악이 되었지만 Bird가 20대의 젊은 나이에 들려줬던 도발, 생기, 에너지는 결코 사라질 수 없는 재즈만의 고유한 가치로 남게 됩니다. 그것은 Charlie Parker와 같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Wolfgang A. Mozart(1756~1791)의 음악이 그랬던 것처럼 음악 안에 정교한 논리(화성적 체계)를 담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짓궂음, 유머, 솔직함, 장난기를 잃지 않았던 천재의 자화상이었던 것입니다. 재즈마저도 낭만주의 음악처럼 깊이를 지녀야 한다고 생각하는 오늘날의 재즈팬들은 전혀 진지하지 않은 것 같은, 아무런 감정적 호소도 없는 것 같은 Charlie Parker의 이런 기질이 어쩌면 생경하게 느껴진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Charlie Parker And His Orchestra - Au Privave
Charlie Parker And His Orchestra - She Rote
Charlie Parker And His Orchestra - K.C. Blues
Charlie Parker And His Orchestra - Si Si
Bird의 팬이라면 물론이고, 비밥팬 혹은 재즈팬이라면 놓쳐서는 안 될 음반 한 장을 여기, 마지막으로 플레이리스트에 덧붙입니다. 지난 2004년에 발굴된 이 녹음은 1945년 6월, Charlie Parker가 몸담고 있었던 Dizzy Gillespie Quintet의 뉴욕 타운홀 실황입니다.
이 연주회는 단파 방송으로 뉴욕에 중계되었는데 송출된 방송 녹음이 아니라 현장의 소리가 릴 테이프에 직접 녹음되어 있었고,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 공개된 Bird 혹은 Dizzy의 그 어떤 부틀렉보다 음질이 뛰어납니다. 더욱이 지금까지 계속 이야기했던 음반 포맷 상의 제약이 전혀 없이 실황연주에서 마음껏 쏟아내는 즉흥연주는 비밥의 탄생 그 현장으로 우리를 데려다 니다. 20-30대의 젊은 도발자들이 음악 안에 수수께끼를 숨겨 놓고 그 암호들을 현란하게 연주했던 그 시절의 순간. 재즈는 그 어떤 음악도 흉내 낼 수 없는 특유의 쾌감과 아름다움을 획득한 순간이었습니다. 이 녹음을 듣고 있자면 1950년대 재즈팬들의 낙서처럼, Bird가 눈앞에 다시 살아올 것 같은 느낌이 문뜩 들기도 합니다.
Dizzy Gillespie, Charlie Parker - Be Bop
Dizzy Gillespie, Charlie Parker - A Night In Tunisia
Dizzy Gillespie, Charlie Parker - Salt Peanuts
Dizzy Gillespie, Charlie Parker - Hot Ho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