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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lon Sep 14. 2020

1978년 한국재즈, 그리고 박성연

장르 인사이드 #재즈

바람이 붑니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바람은 어느덧 가을이 되어 창문을 두드립니다. 재즈팬들에게는 이 계절이 되면 늘 생각나는 곡이 생겼습니다. 피아니스트 임인건의 2016년 앨범 [야누스, 그 기억의 현재]에 실린 '바람이 부네요'입니다. 이 곡은 특별히 지난 8월 23일 세상을 떠난 박성연 님(1943~2020)이 앨범에 참여해서 불렀던 곡입니다.


글ㅣ황덕호 (음악평론가, KBS클래식FM Jazz수첩 진행)


박성연 님은 지난 세월 좋은 노래를 들려주었던 대표적인 한국의 재즈 보컬리스트였고 동시에 1978년에 재즈클럽 야누스를 열어서 국내 재즈 음악인들을 위한 최초의 공간을 만들었던 분입니다. 임인건은 1986년부터 야누스에서 연주했고 긴 세월 동안 야누스에서 만난 선배 재즈 음악인들을 보면서 그들에 대한 기억을, 그리고 그들의 현재 모습을 [야누스, 그 기억의 현재]에 담았습니다.


이 앨범은 나온 지 어느덧 4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그 사이에 앨범에 참여하신 분들 중 고인이 되신 분은 박성연 님 말고도 한 분이 더 계십니다. 클라리넷 연주자 이동기 님(1938~2018)입니다. 이동기 님은 클라리넷 연주뿐만이 아니라 이 앨범에서 임인건 작곡의 '하도리 가는 길'에서 매력적인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테너 색소폰 솔로에는 김수열, 피아노 솔로에 임인건입니다. 


임인건 - 별빛의 노래 (Vocal 박성연)

임인건 - 바람이 부네요 (Vocal 박성연)

임인건 - When you wish upon a star (Clarinet 이동기)

임인건 - 하도리 가는 길 (Vocal 이동기)


[야누스, 기억의 현재]에 참여했던 박성연, 이동기, 김수열, 이판근(작곡), 최선배 님(트럼펫)은 모두 "대한민국 재즈 1세대"란 이름으로 불리는 음악인들입니다. 하지만 정작 이분들은 "1세대'란 이름을 들으면 손사래를 치셨습니다. 당신들 이전에 재즈를 연주하던 선배들이 계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맞습니다. 역사적으로 살피면 한국 재즈는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음반으로 확인된 것만 보더라도 김해송, 손목인이 이미 식민지 시대에 재즈를 녹음했고 해방 이후에도 엄토미, 길옥윤 등 1910년대~'20년대에 태어나신 음악인들은 일찍이 재즈에 관심을 갖고 이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재즈 연주자"라고 부를 수 있는 음악인들이 대중 앞에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인 1970년대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1978년은 한국 재즈 음악인의 존재가 드디어 선명하게 드러난 해였습니다.

1978년 서울 마장동 스튜디오에는 편곡자인 이판근을 중심으로 강대관(트럼펫), 김수열, 손수길 이수영(베이스), 최세진(드럼)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됩니다. 이들은 'Rainy Night in Georgia'(비 내리는 밤에), 'Softly as in a Morning Sunrise'(해맑은 아침), 'My Favorite Things'(나의 모든 것)와 같은 스탠더드 넘버뿐만이 아니라 우리 민요 '아리랑', '한오백년', 새로운 창작곡 '빈 바다', '가시리'를 한 장의 앨범에 담은 [Jazz: 째즈로 들어본 우리 민요, 가요, 팝송!]을 녹음하게 됩니다. 프로듀서 엄진이 제작한 이 앨범은 앨범 제목에서 "재즈"를 표방한 최초의 국내 음반이었으며 모던재즈 이후의 스타일을 온전히 흡수한 최초의 국내 앨범이었습니다(5중주 녹음 후 프로듀서 엄진은 타악기 주자 류복성을 초대해 그의 봉고 연주를 오버더빙했습니다).

피아니스트 손수길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녹음에 들어갈 때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뭔가 우리만의 느낌이 있는 재즈, 코리안 스피리추얼 재즈, 코리안 소울 재즈를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었다."


그 의도는 이들의 연주를 통해 성공적으로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이 음반을 통해 비록 극소수일지언정 한국의 음악팬들은 한국에도 재즈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이판근과 코리안째즈퀸텟 `78 [JAZZ: 째즈로 들어본 우리 민요, 가요, 팝송!]


앨범 [Jazz]에 참여했던 이판근, 강대관, 김수열, 최세진, 류복성은 모두 연주경력 20년이 넘었던 시점에서 처음 재즈앨범을 녹음했습니다. 이들은 1950년대 중후반부터 미8군 사령부 소속 클럽에서 연주를 시작했던 연주자로 당시 미군들이 듣고 싶은 모든 종류의 음악들(스탠더드 팝, 컨트리, R&B, 로큰롤 등)을 연주하던 음악인들이었습니다. 1950년대 자료에 의하면 당시 미8군 산하의 클럽 수는 전국적으로 264개로, 이 클럽 무대에는 가끔 미국 음악인들이 위문 공연을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매일 벌어지는 클럽 무대를 채우는 것은 한국 음악인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공식적인 통계자료는 없지만 당시 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한국 음악인의 숫자는 어림잡아 3천 명 정도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이들은 8군에서 주관하는 엄격한 오디션을 거쳤고 실력에 따라 급여 등급도 나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자신을 재즈 음악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의 숫자는 극소수였습니다. 왜냐하면 8군 무대 안에서도 재즈에 대한 수요는 아주 적었고 국내 음악팬들 역시 당시에는 재즈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63년 베트남전의 발발로 미8군 병력이 이동하자 8년간 전성기를 누렸던 미8군 클럽은 점차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8군 무대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음악인들은 '60년대로 접어들면서 방송국과 시내 클럽에서 점차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8군 무대에서 유독 재즈에 관심을 갖고 있던 연주자인 이판근, 강대관, 김수열이 8군 무대 밖(이때 연주자들은 이를 "일반무대"라고 불렀습니다)에서 처음 만난 것은 1969년 서울 무교동에 위치한 클럽 "스타 더스트"에서였습니다. 비교적 재즈에 대해 관대했던 이 클럽에서 지속적으로 연주했던 이들은 젊은 피아니스트 손수길을 그곳에서 만났고 1977년 당시 미군 전용 호텔이었던 내자 호텔에서 열린 심야 잼세션에 참가하면서 드러머 최세진과 조우하게 됩니다. 최세진은 '60년대 초 8군 무대를 떠나 홍콩에서 연주생활을 했던 분이셨습니다. 그러니까 앨범 [Jazz]에 참여했던 연주자 대부분이 '60년대 말부터 '70년대를 거치면서 모두 만났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국내의 음악팬들이 한국의 재즈 연주자들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습니다. '78년 여름 이태원에 문을 연 클럽 "올댓재즈" 역시 당시에는 외국인이 경영하며 8군에서 복무 중인 연주자들이 주로 연주하던 외국인 전용 클럽이었고 국내 음악인들이 연주하고 국내 음악팬들이 드나들 수 있는 재즈 공간은 그때까지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78년 11월, 그러니까 앨범 [Jazz]가 녹음된 그해에 신촌역 뒤편, 신촌시장 골목 안쪽에 클럽 "야누스"가 문을 열게 됩니다. 8군 무대에서 노래를 시작해 내자호텔에서도 활동했던 보컬리스트 박성연이 업주 눈치 안 보고 오로지 재즈만 실컷 부르고 싶어서 직접 문을 연 곳이 클럽 야누스였습니다. 자연히 그곳에는 박성연과 마찬가지로 재즈 연주에 목말라 하던 연주자들이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앨범 [Jazz]에 참여했던 이판근, 강대관, 김수열은 물론이고 당시 방송국 악단, 스튜디오 세션맨으로 활동하던 최선배, 신관웅(피아노), '60년대 말까지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해외에서 연주하던 조상국(드럼), 해외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정성조(색소폰, 플루트), 재즈 동네를 떠나 있다가 다시 재즈에 열정을 품고 돌아온 이동기 등이 모두 야누스를 그들의 무대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비로소 재즈는 먼 외국의 음악이 아니라 한국의 음악인들이 연주하는 우리의 음악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 시작이 1978년이었습니다.

박성연과 클럽 야누스의 연주자들은 개관한 지 11년 만이었던 1989년 그들의 첫 앨범을 녹음했습니다. 이 앨범에는 앞서 언급했던 연주자들 외에도 신동진(테너 색소폰, 플루트), 조정수(기타)가 가세해서 보다 풍성한 사운드를 만들어 냈습니다.


박성연 [Jazz At The Janus]


1978년 한국 재즈동네에서 있었던 일은 몇 가지 더 있습니다. 앨범 [Jazz]에서 봉고를 연주했던 류복성은 자신의 첫 앨범 [류복성과 신호등]을 발표했고(이 앨범에도 강대관, 최세진, 정성조 등 당시 재즈 뮤지션들의 연주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서울 안국동에 위치한 공간 사랑에서도 정기적인 재즈 공연이 열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전까지 외국인들만 이용하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연주되던 재즈가 비로소 시민들 앞에 선보이기 시작했던 것, 그리고 오랫동안 대중과 만나지 못했던 한국의 재즈 음악인들이 그들의 연주를 음반으로 발표하기 시작했던 것도 1978년이었습니다. 이렇게 이들의 재즈 앨범이 등장하고 재즈만을 위한 공간이 어렵게 마련되면서 드디어 우리에게도 "재즈 음악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인물들이 탄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분들을 마땅히 '대한민국 재즈 1세대'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동료들이 재즈를 포기하고 뿔뿔이 흩어졌지만 이분들 만큼은 재즈가 있는 자리라면 늘 그곳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1978년은 어느덧 42년 전이 되었습니다. 그 세월 속에서 많은 후배 음악인들이 등장했고 한국 재즈의 질은 특히 21세기 들어서 가파르게 성장했습니다. 이제 한국 재즈 1세대 연주자들과 새롭게 등장한 젊은 연주자들의 나이 차이는 할아버지와 손자뻘 정도가 됩니다. 그 사이에 음악을 접하는 환경, 문화 모든 것이 너무나도 바뀌었고 무엇보다도 재즈 그 자체가 많은 변화를 보였습니다. 어쩌면 야속하게도 그 세대 사이에서 공유할 수 있는 것은 무척 적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1세대 재즈 연주자들로부터 단 한 가지만은 분명히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바로 늘 재즈를 곁에 두었던 그분들의 애정과 열정입니다. 재즈 월간지 "Down Beat" 한 권을 보기 위해 매달 미문화원에 까다로운 서류를 제출하고 찾아갔다는 그분들의 전설과 같은 이야기는 단지 1세대들만의 노고가 아닙니다. 재즈 음악인들에게는 새로운 어려움이 늘 눈앞에 있기 때문입니다(그리고 그것은 넓게 보자면 99.9% 거의 모든 음악인들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재즈를 연주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 연주를 들으며 희노애락을 느끼고 위안을 받습니다.

그 동기는 모르겠지만(어쩌면 그다지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누군가가 재즈를 버리지 않고 그 음악을 만들 때, 그리고 그 음악을 잊지 않고 누군가가 들어 줄 때 그곳에 재즈는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재즈는 42년의 세월을 지켜 온 것입니다. 그래서, 박성연이라는 이름에서 우리가 떠올리는 것은 그분의 노래뿐만이 아니라 야누스라는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37년 동안 네 번이나 자리를 옮겼음에도, '길 없는 길'을 하염없이 걸었음에도, 결코 야누스의 문을 닫지 않았던 재즈에 대한 그분의 사랑, 그것입니다. 그래서 박성연 님이 떠나시고 그의 노래를 들을 때면 슬픔이 밀려오는 것도 사실이지만, 재즈팬으로서 새로운 힘을 얻게 되는 것은 그 사랑과 열정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젠 짐 내려놓으시고 편히 쉬시겠지요. 바람이 붑니다. - Thank You, 박성연!


임인건 - 길 없는 길 (Vocal 박성연)

임인건 - 야누스 블루스

임인건 - 바람이 부네요 (Choir 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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