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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계에는 음악 팬들이 자주 참고하는 명반 리스트가 있습니다. 롤링스톤지(紙)에서 선정하는 "500대 명반(500 Greatest Albums Of All Time)"이 그것이죠. 음악평론가들과 업계 관련자들이 대중음악사상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고 생각하는 명반들을 가중치를 부여해 선정하면, 이것을 집계해 최종적으로 앨범의 순위를 결정하는 리스트로 알려져 있습니다.
"500대 명반"은 2003년 첫 선정을 한 이후 2012년에 개정을 거친 바 있는데요. 2020년, 이 리스트가 또 한 번 개정되며 변동이 있었습니다. 어떤 부분이 달라졌을까요?
개정, 그 이상의 개정
우선 이번 개정은 2012년의 개정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일부 앨범들의 순위를 조정하고, 개정 시점까지 업데이트된 주요 앨범들을 채워 넣는 과정이던 2012년의 개정에 비해, 이번에는 전체 순위 자체가 상당수 조정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1위 변동"입니다. 이전, 이 리스트의 가장 윗머리는 The Beatles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가 차지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Marvin Gaye의 [What's Going On?]이 리스트 정상에 이름을 올리게 됐습니다.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는 무려 24위로 순위 하락했죠. [What's Going On?]은 2012년까지는 6위를 차지하고 있던 앨범이었습니다.
Marvin Gaye [What's Going On?]
The Beatles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What's Going On?]은 Marvin Gaye의 사회적 의식이 강하게 투영된 앨범입니다. 앨범에서 다루는 소재들부터 베트남전에 대한 비판, 환경과 가난 문제, 사람들과의 연대 등 묵직한 주제들이 주를 이루는데요. 이는 Marvin Gaye 스스로 프로듀싱의 전권을 소속사(모타운)로부터 획득했기 때문에 가능한 주제들이었습니다. 이 앨범 전까지의 모타운은 아티스트의 작가주의적 관점을 반영하기보다는 철저하게 시장을 계산하고, 전문 작곡가들이 붙어 곡을 만드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이지요.
혹자는 이후 모타운에서 나온 불세출의 싱어송라이터, Stevie Wonder의 음악적 업적 역시 Marvin Gaye의 선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라고 말합니다. 빼어난 음악적 성과뿐 아니라 산업의 흐름을 바꿨다는 역사적 측면에서도 조망되는 앨범이기 때문에, [What's Going On?]은 오랜 시간 음악 팬들 사이에서 명반으로 손꼽혀 왔습니다.
일찍부터 명작의 지위를 획득한 앨범이지만, 이것이 롤링스톤의 리스트에서 1위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음악 역사에서 "록"의 등장과 그 발전 과정을 가장 중요하게 조망하던 평론가들이 이제는 소울과 힙합 등 흑인음악을 이전보다 더욱 중요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방증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고착화된 평가에서 벗어나 시대 흐름을 더욱 반영하려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개정 이 아닌가 싶습니다.
새 시대의 로큰롤=힙합
대중음악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기점 중 하나가 바로 1950년대 "로큰롤의 태동"입니다. 이 시기가 음악의 소비 주체가 기성세대에서 10대로 단번에 이동한 순간이기 때문이지요. 21세기, 이 흐름과 유사하게 보이는 현상이 있다면 단연 "힙합의 대세화"일 겁니다. 현재 빌보드 Top10만 봐도 절반 이상에 힙합 곡이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현시대 힙합의 인기는 절대적입니다.
롤링스톤지 또한 이를 의식한 것으로 보입니다. 상위권에 힙합계 클래식이 다수 들어왔는데요. 래퍼이자 R&B 싱어송라이터인 Lauryn Hill의 대표작 [The Miseducation of Lauryn Hill]이 10위까지 올랐습니다. 2012년 순위에서는 314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아예 앨범의 입지 자체가 달라진 셈입니다.
뿐만 아니라 Public Enemy의 격한 저항을 담은 앨범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는 48위에서 15위로 직행했으며, Notorious B.I.G.의 명반 [Ready To Die]는 134위에서 22위로, Wu-Tang Clan의 상징적 앨범 [Enter the Wu-Tang (36 Chambers)]는 387위에서 27위로 급격한 순위의 이동이 있었습니다.
Lauryn Hill [The Miseducation of Lauryn Hill]
Public Enemy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
Notorious B.I.G. [Ready To Die]
Wu-Tang Clan [Enter the Wu-Tang (36 Chambers)]
빼어난 샘플링 기반의 프로듀싱을 보여준 Kanye West의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가 17위로, 흑인 커뮤니티를 시작으로 엄청난 반응이 있었던 Kendrick Lamar의 [To Pimp a Butterfly]가 19위로 오른 것 역시 주목할 만한 포인트입니다. 두 앨범 모두 2010년대의 앨범들이지만, 롤링스톤 측에서는 이미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그리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영향력을 미칠 앨범으로 판단한 듯 하네요.
어쩌면 지금 시기는 장르를 넘어 또 한 번 소비주체가 세대를 교체하는 시점인지도 모릅니다. 힙합은 분명 지금 시대의 로큰롤입니다.
Kanye West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
Kendrick Lamar [To Pimp a Butterfly]
주목 받는 영건들
Z세대 아이콘들의 순위권 진입 또한 눈에 띕니다. 대표적으로 Billie Eilish인데요. 첫 정규앨범 [WHEN WE ALL FALL ASLEEP, WHERE DO WE GO?]를 397위에 올리며 또 한 번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는 무려 2019년 상반기에 발매된 앨범입니다. 앞서의 예들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부여하는 앨범의 가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동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만약 이 앨범을 기점으로 (Billie Eilish로부터 영향을 받은) 내밀하고도 어두운 색채를 띤 음악가들이 다수 출현한다면 작품에 대한 평가는 이후 더욱 높아질 것으로 보입니다.
Harry Styles의 [Fine Line]은 491위에 이름을 올렸는데요. 이는 무려 2019년 12월에 발매된, 아직 나온 지 1년이 채 안 되는 앨범입니다. 세계구급 팝스타였던 그룹 One Direction 시절을 지나, 솔로 아티스트로 훌쩍 성장한 Harry에 대한 평단의 찬사를 느낄 수 있는 결과가 아닌가 하네요.
Billie Eilish [WHEN WE ALL FALL ASLEEP, WHERE DO WE GO?]
2012, 그리고 2020
8년 만의 개정과 리스트 변화. 동의하시나요? 쉽게 동의를 할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특히 록 순수주의자들에게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건, 앨범에 대한 평가는 가치판단의 영역이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리스트를 보며 그동안 사회적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음을, 그리고 시간이 또 이만큼이나 지났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500대 명반(500 Greatest Albums Of All Time)"의 전체 순위는 롤링스톤 홈페이지(rollingstone.com)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