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진 [Solveig](2002)
실패한 앨범이다. 상업적으로는 그렇다. 시차를 두고 뒤늦게 찬사가 따라붙었지만 뮤지션 본인에게 큰 위안이 될 리 없다. 실제로도 김광진은 "좌절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과연 그럴 만하다. 첫 곡 '솔베이지의 노래'부터 마지막에 위치한 '약속'까지, 도무지 흠결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까닭이다. 김광진의 대표"곡"은 앞으로도 '마법의 성' 아니면 '편지'일 것이다. 앨범으로는 논쟁을 벌일 것도 없다. [Solveig]가 최고다.
글ㅣ배순탁 (음악평론가,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
키워드 몇 가지. [Solveig]에서 김광진은 신화 속 이야기를 끌어들여와 "항해"와 "귀향"이라는 테마를 완성한다. 전자를 "떠남", 후자를 "귀환"이라 바꿔 표현해도 좋다. 신화가 아닌 현재를 살아가는 일상의 영역도 존재한다. 어떤 곡에서는 모던 록의 문법을 빌려 지친 일상의 표정을 쾌활한 톤으로 스케치('출근')하고, '동경소녀'에서는 짝사랑하는 주인공의 심정을 쫄깃한 기타와 키보드 리듬에 실어 나른다.
'비타민'은 어떤가. 펑크(funk) 기타와 드럼이 메인을 잠식하는 가운데 색소폰이 초반부터 터지고, 곡 전체는 활력으로 넘친다. '출근', '동경소녀', '비타민', 마지막으로 '유치원에 간 사나이'까지, 이렇게 4곡은 이 음반의 지향이 "공연"에 있음을 증명한다. 말 그대로 "라이브"하다. 뭐랄까. 김광진 특유의 발라드에 틈틈이 섞여 악센트를 부여하는 역할을 맡는 셈이다.
이제 신화 속으로 들어갈 차례다. 우선 솔베이지는 헨리크 입센(Henrik Ibsen)의 극시 [페르 귄트(Peer Gynt)]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 극시에서 페르 귄트는 부와 명예를 좇아 떠나고, 남겨진 솔베이지는 그를 기다린다. 늙고 병들어 고향으로 돌아온 페르 귄트의 임종을 곁에서 지킨다. 그렇다면 '오디세이의 항해'는 어떤가.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산 오디세이는 아내 페넬로페가 있는 이타카로 가는 길에서 숱한 고난을 겪는다. 따라서 두 신화의 결은 서로 다르지만 "돌아가는 여정"을 그렸다는 측면에서는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잠깐.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스토리다. 누군가를 향해 가는 여정 가운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식의 이야기 말이다. 그렇다. '마법의 성'(1994)이다. 이 곡이 발표된 게 벌써 26년 전이다. 그럼에도 변함없는 아름다움이 이 곡에는 서려있다. 가사를 다시 한번 보자.
마법의 성을 지나 늪을 건너/어둠의 동굴 속 멀리 그대가 보여/이제 나의 손을 잡아보아요/우리의 몸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죠
그럼에도, 신화는 여전히 과거에 종속되어 있다. 물론 그것을 현재 시제로 끌어올 수 있다면 어떤 교훈이나 감동을 느낄 수는 있을 테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것"에 미치지는 못한다. 바꿔 말하면 "라이브"하지 못하다. 어쩌면 이게 김광진이 신화와 현재를 음반 속에서 교차시킨 욕망의 발원지는 아니었을까. 이 앨범을 들으면서 내내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거대한 신화보다 자잘한 현재가 어쨌거나 의미 있다는 것이다.
강제적 과음으로 인해 출근길 똑같은 지하철 안에서 머리가 빠개질 것 같아도 어딘가에서 내 인생의 '비타민'이 되어줄 '동경소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이것이 현재다. 이것이 라이브다. 그러다가 '유치원에 간 사나이'가 된 내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신화에서 테마를 빌려온 곡들도 기실 마찬가지다. 김광진은 신화에 붙들리지 않는다. 뇌관을 제거한 과거라는 미혹에 빠지지 않는다. 대신 그 신화를 자연스럽게 "지금, 여기"로 끌어와 사랑과 이별, 재회의 노래로 풀어놓는다. 그리하여 거대하지만 빛바랜 신화를 자잘하지만 생생한 일상의 영역에 안착시킨다. 음반의 끝이 재회를 노래하는 '약속'으로 정리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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