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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kamoto Ryuichi라는 이름과 음악이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라면, 자신도 모르게 익숙해졌을 곡 하나를 우선적으로 들으면서 이 글을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1987년 영화 '마지막 황제'의 OST이자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의 BGM으로 쓰인 곡, 'Rain'입니다.
주말간 Sakamoto Ryuichi의 별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3월 28일에 세상을 떠났지만, 소식이 전해진 것은 4월 2일이 되어서였습니다. 소속사에서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하며 쓴, Sakamoto Ryuichi가 생전 좋아했다는 문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Art is long, life is short(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Sakamoto Ryuichi는 일본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이자, 세계적인 영화음악 거장입니다. 아카데미 작곡상과 그래미어워드, 그리고 골든글로브어워드까지 수상 타이틀도 화려하지만, 사실 그의 음악세계는 수상목록과 몇 마디 말로 표현하기에는 '지나치게' 방대합니다.
일본 음악 시장에 굉장한 영향력을 끼친 그룹 시절(YMO, Yellow Magic Orchestra)의 신스팝과 전자음악, 그리고 보다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진 분야인 영화음악까지. 그의 음악세계는 넓은 스펙트럼을 자랑하면서도, 활동시기마다 뚜렷한 개성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의 음악은 넓고, 또 깊습니다.
Hosono Haruomi와 Takahashi Yukihiro, 그리고 Sakamoto Ryuichi. 불세출의 뮤지션 셋이 모인 슈퍼그룹 YMO는 전자음악에 클래식과 현대음악적 요소를 도입하여 세상에 신선한 충격을 준 그룹이었습니다. 그것도 영미권이 아닌 동아시아 끝단, 일본에서 시작한 그룹이다 보니 이들이 세계적 주목을 받은 것은 더욱 특별한 현상이었죠.
당시 그룹 시절의 Sakamoto Ryuichi는 신디사이저의 신기술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선구자격 아티스트였습니다. 특히 지금도 널리 쓰이는, TR-808 드럼 머신을 사용한 초기작들에서의 접근법은 현대 전자 음악에도 굉장한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아래 트랙은 순서대로 1978년, 1979년 발매작입니다.
YMO 'Rydeen (2018 Bob Ludwig Remastering)'
1984년 YMO의 해체를 전후로, 그는 영화음악 작업을 통해 보다 글로벌한 인지도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음악은 물론 배우로도 참여한 1983년 '전장의 크리스마스', 그리고 아카데미 작곡상을 수상한 1984년 '마지막 황제'의 영화음악 작업은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더해주었습니다.
Sakamoto Ryuichi는 드뷔시를 비롯한 클래식 음악가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지만, 각국의 로컬음악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황제' 작업 전 중국의 전통음악 앨범을 구할 수 있는 대로 구해 들으며 공부했다는 일화는 그의 음악이 끝없는 음악적 탐구심으로부터 왔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아래 두 곡은 순서대로 '전장의 크리스마스'와 '마지막 황제'의 OST입니다.
Sakamoto Ryuichi 'Merry Christmas Mr. Lawrence'
Sakamoto Ryuichi 'The Last Emperor'
그는 2014년 인후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으면서도 음악 작업에 매진했습니다. 아카데미 감독상(*곤잘레스 이냐리투) 및 남우주연상(*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을 수상하기도 했던 2015년의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에서 들렸던 미니멀하면서도 압도적인 사운드가 바로 이 시기 Sakamoto Ryuichi의 손끝에서 나온 소리들입니다.
이후에도 다수의 영화음악 작업과 함께 자신의 정규앨범인 [async](2017)까지 작업하며 창작열을 불태운 그이지만, 2021년 직장암 전이 판정을 추가적으로 받고, 투병 중 2022년 시한부 선고를 받으며 팬들의 안타까움을 샀습니다.
Sakamoto Ryuichi, Alva Noto 'The Revenant Main Theme'
그는 후반기에는 특히 외부적인 음악작업보다는 내면적인 음악들에 더욱 집중해 왔습니다. 시한부 판정 이전, 2017년의 [async] 때만 해도 이미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 앨범이 될지도 모른다는 언급을 한 바 있으며, 음악에서도 굉장히 어두운 면모가 눈에 띄었는데요. 개중에서도 'Andata'는 장송곡처럼 들린다는 리스너들의 후기도 상당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유작은 그가 투병 말기에 스케치하듯 만든 곡들을 엮은 [12](2023)입니다. 그와 친분이 있는 이우환 화백이 커버이미지 작업을 맡은 것으로도 세간의 이야깃거리였는데요. 곡을 만든 날짜들이 트랙명이 되어 박혀있는 이 앨범은 어딘가 비어있고, 느릿느릿하며, 신비롭고 사색적인 소리들을 담고 있습니다.
아주 개인적인 해석이지만, 그가 [async]로 투병으로 인한 고통과 혼란의 시기를 그려냈다면, [12]를 통해서는 순응 속에서 심적 탐구를 표현한 듯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그의 마지막에 '여백'을 남겨두었습니다. 앨범은 누군가에게는 일상의 소리일지도 모를 '풍경 소리'로 끝을 맺습니다.
Sakamoto Ryuichi '20220302 - sarabande'
영화 '아무도 모른다'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로 국내에도 많은 팬을 가진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츠의 6월 개봉 예정작 '괴물'의 OST를 Sakamoto Ryuichi가 담당했다는 소식이 있기 때문에, 그의 사망 소식과 맞물린 현재 영화에 대한 팬들의 기대감 또한 높아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말년에 작업한 음악작업이기 때문에, 어쩌면 영화음악에서도 어떤 에너지보다는 많은 여백이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를 애정하는 팬들에게는 마지막 선물이 될 것 같네요.
그의 음악을 돌아보니 실로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았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