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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디바, 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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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lon

Special | 현미, 85세를 일기로 잠들다


며칠 전 또 하나의

안타까운 소식이 들렸습니다.

현역 최고령 가수로 손꼽히던

현미의 별세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는데요.


어르신들 세대에서야 다들

익히 알고 있는 명가수이지만,

전성기가 1960년대인 가수이다 보니

아무래도 지금 세대는

현미라는 가수에 대한 이해도가

적거나, 없을 수가 있습니다.


하여, 여기서는 가수 현미의 노래와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해보려 합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챙겨보는

TV 프로그램의 패널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면,

이 글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거예요.


묵직한 음성으로 감동을 선사하는 가수, 현미




1960년대에 전성기를 보낸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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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미는 1938년 출생으로

평안남도 평양 출신입니다.

즉, 이제는 국내에 많이 남지 않은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입니다.


전란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온 이후에는

중저음의 허스키한 음색과

타고난 성량을 바탕으로

미8군에서부터 가수로 활동했는데요.


미8군 출신이었기 때문에,

당시만 해도 익숙하지 않았던

재즈적인 음악적 표현과 뉘앙스를

익힐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특유의 재즈적 가창은

'떠날때는 말 없이'와 같은 트랙에서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현미 '떠날때는 말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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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과 이금희 등, 동시대의 여가수들과

현미를 비교해보면 그의 음색이 무척이나

독특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날렵하기보다는 묵직하고,

애교스럽기보다는 절절함이 묻은 그의 가창은

당대의 내로라하는 가수들 사이에서도

독특한 지문을 만들어 냈습니다.


가진 성량이 워낙 크다 보니

마이크 몇 발자국 뒤에서

녹음을 해야 했다는 것 역시

잘 알려진 일화입니다.


분명한 음악적 색깔을 바탕으로, 현미는

1960년대의 목소리로 활동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1960년대 음악계의

산 증인 같은 존재였습니다.


현미 '밤안개'




이봉조와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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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미의 인기곡들은 대부분

60년대부터 70년대 초반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그에게 대부분의 노래를 만들어준 인물이

바로 작곡가이자 색소포니스트인 이봉조입니다.


현미의 미 8군 데뷔곡인 '아 목동아' 역시

원래 'O Danny Boy'라는 아일랜드 민요를

이봉조가 번안한 곡이었습니다.

이 곡은 이후 패티김과 최희준 등

다른 아티스트들도 많이 부르며

인기곡으로 자리잡았죠.


이봉조와 현미는

'보고 싶은 얼굴'(1963),

'떠날때는 말없이'(1964),

'무작정 좋았어요'(1966),

'몽땅 내사랑'(1967)을 히트시키며

1960년대를 자신들의 시대로 만들었습니다.


현미 'Danny Boy'

현미 '보고 싶은 얼굴'

현미 '떠날때는 말없이'

현미 '무작정 좋았어요'

현미 '몽땅 내사랑'




TV에서 활약한 2000년대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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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점은, 현미가

1960년대에 인기를 얻은 가수이면서도

최근까지 꾸준히 활동해왔다는 것입니다.


화통한 입담과 넉넉한 인품을 가진 그를,

시대는 잊지 않고 계속해서 소환했습니다.


현미는 2000년대 들어서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으로,

또 각종 예능의 패널로 활약해 왔습니다.


2022년 '불후의 명곡2' 전설의 디바 특집에서는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열창하기도 했는데요.


몸이 불편한 원곡자 한명숙을 대신해 무대에 올랐다며

무대 직후 몸이 편찮은 한명숙에게

친구로서 영상편지를 보낸 장면은

많은 시청자들을 울리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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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와 함께 기억되는 이름들,

특히 후대가 '전설'이라는 수식으로

특별히 예우하는 가수들은

그 위치 때문에라도 대부분

친근한 이미지를 갖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현미는 달랐습니다.

마치 옆집 할머니 같은 푸근함으로

방송에서 개구지게 농담을 건넸고,

무게를 잡기보다는 분위기를 풀어내는

가수이자 방송인이었으니까요.


한 경연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했을 때,

경직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몸소 앞서 나와 춤을 추던 모습은

여전히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을 겁니다.




현대사 속 어머니들의 자화상을 담았던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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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의 한 페이지에서,

현미는 전후의 실향민과

여성의 삶을 대변하는 가수였습니다.

다시 말해, 어르신들 세대에서는

어머니의 자화상을 담은 가수라고 할까요?


전쟁을 겪은 이산가족이자 실향민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봉조와의 기구한 연애사가 있기 때문에

전 국민적인 연민을 자아내기도 했지만,

현미는 그의 삶을 씩씩하게 헤쳐왔습니다.


갖은 인생의 경험으로

주변에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그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가수였습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덕담을 건넸던 푸근한 모습이

앞으로도 많이 그리울 것 같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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