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홍열 Apr 19. 2016

한 젊은 연구자의 편력 시대

마이너리티 코뮌 : 동아시아 이방인이 듣고 쓰는 마을의 시공간 신지영 저


한 젊은 연구자의 편력 시대


마이너리티 코뮌 : 동아시아 이방인이 듣고 쓰는 마을의 시공간


괴테의 자전적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의 도착지는 아우스빌둥, Ausbildung이다. 우리말로 교육, 양성, 수련, 수업, 단련, 형성 정도로 번역되는 단어다. 교양이라는 뜻의 독일어 단어 bildung 에 계속, 반복의 의미가 있는 전치사 aus 가 붙은 이 합성어의 실질적 의미는 완성된 교양인이다. 미성숙의 어린 소년이 계속 노력해서 언젠가는 완성된 마이스터가 될 때 어울리는 단어다. 괴테가 꿈꾸었던 이상향이다. 모든 것이 붕괴되고 아직 새로운 질서는 오지 않은 근대의 여명, 중세 말기에서 근대 초입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세계사적 고민과 그 고민에 대한 솔류션을 찾고자 했던, 두 세계에 걸쳐 있는 지식인의 자기 고민이고 그 목적지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의 목적지 아우스빌둥이 개인적 교양의 완성이라면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의 목적지 아우스빌둥의 목적지는 사회적 교양의 완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둘 다 ‘완성’에 의미를 두었다는 면에서는 동일하다. 완성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욕망이다. 괴테뿐만이 아니라 마르크스, 칸트, 헤겔, 바그너, 히틀러도 결코 도달했지 못한 미지의 시간이다. 독일 철학이 어디에서 출발하든 최종 목적지가 관념론으로 끝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지의 시간, 그러나 유토피아의 시간이 최종 목적지다. 공산주의, 영구 평화론, 절대정신, 게르만 신화, 제3제국 모두 다 현실에선 이루어지지 않는 그러나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은 목적지다.


만약 ‘완성’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면 아우스빌둥, Ausbildung 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 있다. 신지영의 편력 시대 [마이너리티 코뮌] 에서 읽는다. 마이너리티의 최종 목표는 메이저리티가 아니다. 메이저리티를 목표로 하는 순간 마이너리티는 더 이상 마이너리티가 아니다. 마이너리티는 늘 마이너리티 코뮌 안에 있으려 한다. 벗어나지 않고 그 안에서 아파하고 함께 울고 밥을 먹으며 다시 건강하게 마이너리티를 확인한다. 내가 마이너리티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수용한다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 짊어짐과 같은 의미가 있다. 혁명 모의가 아니라 함께 아파하는 것이고 행복한 내일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 중 하나가 십자가 극형을 선택하는 것이다.


[마이너리티 코뮌]은 기본적으로 비극적 세계관을 반영한다. 염세적이고 현실적이며 철학적이고 투쟁적인 세계관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적인 세계관이다. 80년 광주, 대추리 주민들, 세월호 유가족과 재능 교육 학습지 교사 농성, 크레인 위에 김진숙에서 후쿠시마 원전 피해자, 오키나와의 오랜 상처들, 재일 조선인, 위안부 할머니, 야숙자의 블루 텐트, 인종주의에 대항한 미국의 블랙 운동 등 저자는 살아 존재하는 모든 [마이너리티 코뮌] 안에서 호흡하고 생활하고 기록하면서 투쟁한다. 삶이란 이런 것이다. 어느 시대가 되든 마이너리티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들과 함께하면서 내가 그들이 되어 스스로 마이너리티의 삶을 사는 것이 학문이고 철학이다.  환경에 따라 적성과 능력에 따라 누구는 밥을 하고 누구는 앞에 나가서 선동을 하고 누구는 기록을 할 뿐이다. 그 안에서 살면서 그 안을 ‘그래도’ 살만한 공동체로 만들어 보는 것이다. 너무 아파하지 말라고 하면서.


근대 이후 새로운 담론은 이론적 담론 투쟁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이론은 없거나 과잉되어 있다. 문제는 현실과 현장이다. 현실적 현장에서 체화된 삶과 그 기록들이 모이고 또 체화되어야 한다. 진보적 지식인들의 많은 글들이 수년 지나지 않아 쓰레기통에 던져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선 메이저리티를 꿈꾸는 진보적 지식인이 대부분이고 그 나머지 중에서는 고답적 이론에 빨갛게 물든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조선 말기에서 근대로 이월되는 과정에 신체가 사회적 담론이 되는 과정을 겪었듯 이제 다시 신체가 사회적 언어로 육화 되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아우스빌둥, Ausbildung, 완성된 교양인은 이런 것이다. 스스로 완성을 포기할 때, [마이너리티 코뮌] 안으로 들어가 나오는 길을 폭파하고 그 안에서 영생을 꿈꿀 때, 그리고 매 순간 구원을 느끼고 확신할 때, 그때 완성된다. 그때마다 완성된다.


젊은 연구자의 건투를 빈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속의 바이오 테크놀로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