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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열 May 10. 2016

보헤미안 정지용의 언어들

원본 정지용 시집 : 이숭원 주해 | 깊은샘


원본 정지용 시집 : 이숭원 주해 | 깊은샘


유쾌하게 읽었다. 백석과 이상의 중간, 혹은 그 둘을 합친 것 느낌이다. 재기 발랄한 표현들이 여러 곳 있다. 사이드라인 처가며 읽는 맛이 좋다. 참 폭넓게 살았고 그리 산만큼 시 소재도 다양하다. 보헤미안의 삶이 이런 듯 싶다. 무슨 특별한 주제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게 더 좋다. 시를 읽으면서 자꾸 주제를 생각하게 되면 이미 그건 시가 아니다.라고 생각됐다. 좋은 표현들이 있어 여기 몇 개 기록해 둔다.


지리 교실 전용 지도는

다시 돌아와 보는 미려한 7월의 정원   

[지도]


마음은 안으로 상장을 차다

[귀로]


귀에 섦은 새소리가 새여 들어와

참한 은시계로 자근자근 얻어맞은 듯

[이른 봄 아침]


이 열매는 지난해 시월상달, 우리 둘의

조그마한 이야기가 비롯될 때 익은 것이어니

[석류]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 멘트에 흐느끼는 불빛

카페 프란스에 가자  

[카페 프란스]


자네는 인어를 잡아

아씨를 삼을 수 있나

[피리]


바다 우로

밤이

걸어온다

[바다 3]


오빠가 가시고 나신 방안에

시계 소리 서마 서마 무서워

[무서운 시계]


은밀히 이르노니 행복이 너를 아조 싫어하더라

[불사조]


나의 임종하는 밤은

귀또리 하나도 울지 마라

[임종]


귀신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 모퉁이, 도체비 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백록담]


꽃도

귀향 사는 곳

[구월동]


명수대 바위틈 진달래 꽃

어찌면 타는듯 붉으뇨

[소곡]


발은 차라리 다이야 처럼 굴러간다

[아스팔트]


바로 이 동네 인사들과 매간에 시세가 얼마며 한평에 얼마 오르고

나린 것이 큰 관심거리지 나의 꾀꼬리 이야기에 어울리는 이가 적다

[꾀꼬리와 국화]


값진 도예는 꼭 음식을 담아야 하나요? 마찬가지로 귀한 책은 몸에 병을 지니듯이 암기하고 있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성화와 함께 멀리 떼어놓고 생각만 하여도 좋고 엷은 황혼이 차차 짙어갈 때 서적의 밀집 부대 앞에 등을 향하여 고요히 앉았기만 함도 교양의 심각한 표정이 됩니다

[밤]     


마지막에 언급된 산문시를 읽을 때 한 참 웃었다. 누군들 안 그러리. 읽지 않은 책이 서재에 가득할 때 답답할 수밖에 없는데 정지용은 굳이 읽지 말고 배경화면으로 이용해도 이미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구라 친다. 유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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