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시인의 자화상은 대개 쓸쓸하다

by 김홍열


눈은 하나만 그려주세요

귀와 입, 팔은 없어도 되고

다리는 여러 개 필요해요


당신이 돌아오실 길

그 모퉁이에 세워놓고

이제 조용히 떠나세요


++


시인의 자화상은 대개 쓸쓸하다. 왜 아니 그러겠는가. 생각은 깊고 언어는 치졸하다. 사랑은 멀고 시간은 더디다. 날고 싶은데 몸뚱이가 무겁고 죽고 싶은데 덕지덕지 묻은 삶의 먼지가 가로막는다. 그저 하고 싶은 것은 단 하나. 한 눈으로만 보기. 듣지 말고, 말하지 말고 그저 보기만 하기. 한 눈으로만 보기. 당신이 떠난 길 모퉁이에서 당신이 떠난 길을 한 눈으로만 보면서 기다리기.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한 눈에 기다림 하나 가득 채우고 기다리기. 죽지 않고 더 이상 쓸쓸하지 않고 시를 쓸 수 있는 유일한 길. 당신이 돌아오실 길, 눈에 가득 채우고 조용히 기다리기. 그 길 하나만 보기. 그리하여 시인이 시가 되어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아도 되는 순간. 이윽고 완성되는 시인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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