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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열 Mar 15. 2017

날조된 신화, 파시즘의 시작

인도에서 온 허황후, 그 만들어진 신화. 이광수 지음


이 책에 의하면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 (김해 김씨 시조) 가 인도에서 왔다는 허황후와 결혼했고 이 허황후가  양천 허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신화는 다음과 같은 과정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허황후 설화가 실린 현존하는 최초의 책은 고려 시대 승려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다. 일연의 삼국유사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제1권

왕력(王曆) 제1 : 신라·고구려·백제·가락 및 후삼국의 연대표)

기이(紀異) 제1 :고조선 이하 삼한·부여·고구려와 통일 삼국 이전의 신라의 유사


제2권

기이(紀異) 제2 : 신라/통일 신라 시대/백제·후백제/가락국에  관한 유사


제3권

흥법(興法) 제3 : 불교 전래의 유래 및 고승의 행적)
탑상(塔像) 제4 : 사기와 탑·불상 등에 얽힌 승전과 사탑의 유래에 관한 기록


제4권

의해(義解) 제5 :고승들의 행적


제5권

신주(神呪) 제6 : 이승들의 전기
감통(感通) 제7 :영험·감응의 영이한 기록

피은(避隱) 제8 :은둔한 일승들의 기록

효선(孝善) 제9 :효행·선행·미담의 기록  (출처: 나무 위키)


이 중 제2권 기이 편 중간에 [가락국기]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시작된다.


천지가 개벽한 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 이름도 없었고, 또한 군신의 칭호도 없었다. 이때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 아홉 간이 있었다. 이들 추장들이 백성들을 통솔했는데 모두 1백 호로 7만 5천 명이었다. 이 사람들은 거의 산과 들에 모여서 살았으며,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먹었다. 후한의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A.C.42) 3월 계욕일(액땜을 하는 날로 목욕을 하고, 물가에서 술을 마심)에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 구지(龜旨-산봉우리의 이름)에서 이상한 기운이 일며,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마을 사람들 2,3백 명이 그곳에 모였는데 사람 소리와 같기도 하지만 그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소리만 들려왔다. (출처 : 박성봉 고경식이 번역한 삼국유사에서)


여기서 언급되는 [가락국기]는 고려 문종 31년인 1076년에 편찬된 <가락국기 >를 일연이 줄여서 수록한 것이다. 이 <가락국기> 는무엇을 참고로 가야사를 서술했을까? [가락국기] 안에 있는 한 문장


개황록에 보면, '양의 무제 중대통 4년임자(532)에 신라에 항복했다.' 고 했다.


이 개황록은 김유신의 사망 (673년) 이후 김유신의 후손들이 가문의 몰락을 접하면서 자신들의 출신을 개황, 황조를 연 가문으로 꾸미려는 목적에서 편찬한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김해 김씨 김유신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조상인 가야의 시조 김수로와 부인 허황후의 이야기를 만들어 책을 펴냈고 그 책을 고려 개국 이후 참고해서 <가락국기>를 편찬했고 그 <가락국기>에 기초해서 일연이 [가락국기]를요약, 정리했다는 이야기다.


처음부터 특정 가문의 선전을 위해 만들다 보니 말이 되지도 않은 이야기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 인도에서 왔다면 바지를 입었을 리 없다

* 허황후의 모국이라는 아유타가 인도사에 등장하는 것은 5세기 중반에서 7세기 중반이다. 

  가야국 초기에는 인도의 그런 지명이 없었다

* 고대 인도에는 무게 중심 차원이든 방호 방호 차원이든 탑을 배에 탑재한다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인도 신화는 삼국유사 속에서 계속 명맥을 유지하다가 조선 시대 족보 만들기 운동이 한 참일 때 적절한 신화가 추가되어 양천 허씨 족보에 오르게 된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봐줄만하다.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김병모가 아동문학가 이종기 등의 근거 없는 이야기를 학문적으로 포장하여 비역사적 전설을 실체 있는 역사로 만들어버렸다. 허황후가 역사적 인물이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니 분명 실제라는 것이다. 이후로 허황후는 실존인물이 되었고 매스컴은 난리 나기 시작했다. 깐수 정수일도 허황후 설화 해석에는 무지하고 이덕일, 이이화 모두 제대로 된 공부 없이 설화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런 내용이다. 읽는 내내 속이 쓰렸다. 우리 사회 지적 수준의 참담함 때문이다. 이건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의 영역이다. 신화는 신화고 역사는 역사다. 둘이 섞이는 순간 반동과 파시즘이 준동하게 된다. 과거에 집착하는 순간 미래를 개척할 동력이 상실당한다.


고생한 저자에게 감사드린다. 일부 중복되는 부분도 꽤 있고 부드럽지 못한 문장도 여럿 있지만 독해에 지장 줄 정도는 아니다. 혹 나중 만나게 되면 소주 한 잔 대접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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