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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열 Sep 25. 2017

가면들의 병기창

발터 벤야민의 문제의식, 문광훈  


본문만 1,000 페이지가 넘는다. 궁금하다. 이 재미없는 책을 완독 하는 사람이 있을까. 단순 호기심에 구글링을 해봤다. 신문사, 온라인 쇼핑, 출판사 등을 제외하고 개인이 쓴 독후감이 있는지. 한두 개 있는 것 같긴 한데, 다 읽고 썼는지는 잘 모르겠다. 2014년 9월에 나온 책이다.  3년 지났다. 벤야민 전공자가 아니라면 완독 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벤야민 전공자라면 더 안 읽을 것 같다. 결국 벤야민 이야기가 아니라 벤야민을 앞세워 자신의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은 에세이에서 끝난 것 같다. 


신문사 서평을 보고 산 것 같다.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읽은 적이 있다. 좀 아쉬어 한 권 더 보고 싶었다. 이 책이 눈에 띄었다. 부피가 두꺼워 쉽게 첫 장을 열지 못했다. 맘 잡고 읽을 시간을 만든 다음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서문에서 저자는 말한다. 


“ 이 책의 목표는 벤야민이라는 한 뛰어난 문필가이자 비평가이고 문예이론가이자 사상가의 전체 모습은 무엇인지 – 그 핵심 구상 가운데 과연 어떤 것이 오늘의 관점에서, 또 한국의 문학적/문화적 지형에서 여전히 타당한 것인지를 검토하는 데 있다. “


‘뛰어난’ 이런 수식어가 맘에 안 들지만 서문이라서 예의상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챕터를 넘길수록 예의가 아니라 진심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끝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마치 밤하늘의 별무리처럼 전체 국면적이면서 구조적으로, 결국 분위기로 드러나는 것, 그것이 바로 벤야민의 이름이다. P 45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표현들이다. 공자 가라사대 같은 느낌이다. 이런 표현이 반복되다 보니 벤야민을 독해하기가 쉽지 않다. 저자가 해석한 벤야민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해석과 분석이 아니라 아우라에서 멈춘 느낌이다. 저자가 벤야민을 묘사한 다음 표현을 보자. 


그는 널리 퍼진 슬로건을 반복하거나 그 이념을 선창 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 퇴락에 유의하고 그 폐허를 즐겨 찾는다. P56 


그나마 이게 벤야민 본모습에 가깝다. 가능성과 한계 사이에서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느끼면서 글을 쓴 지식인이다. 당대 많은 지식인이 이랬다. 혁명의 시대였고 지식인의 시대였다. 시대를 잘 못 이해한 사람도 있고 부족하게 이해한 사람도 있다. 자연스럽다. 비판받을 일이 아니다. 사회적 발언 자체만으로도 기억할만한 가치가 있다. 저자는 다르다. 벤야민의 문제제기는 옳고 좋았는데 시대가, 사회가 받아주지 못해서 결국 좌절할 수밖에 없었고 나라도 복권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과잉 의식이 넘쳐난다. 이런 의식이 책 전편에 길게 흐른다. 책을 읽을수록 벤야민을 독해하고 있는 것인지 저자의 수필을 읽고 있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된다. 물론 이 책은 저자의 책이다. 그러나 내가 원했던 것은 복음서가 아니라 신학이고 에세이가 아니라 분석적 글이다. 책방에서 몇 장 읽었으면 구매하지 않았을 책이다. 아마 서로 달랐던 것 같다. 내가 이 책을 산 이유와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가. 저자는 글을 잘 쓴다. 읽기 부드럽다. 호흡도 길다. 단지 내 취향이 아닐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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