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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열 Aug 16. 2018

"기독교의 근원은 예수가 아니라 바울"

바울의 정치신학 : 야콥 타우베스 저 / 조효원 역


이 책은 타우베스가 1987년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한 강연을 풀어쓴 글이다. 30년 가까이 흘렸다. 30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30년은 중세의 천년보다 더 길다. 그 30년 전에 타우베스는 지난 이 천년 전 이야기를 지금의 언어로 우리에게 조곤조곤 들려준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의 소재는 이 천년 전 바울에게서 시작되지만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새로운 종교’에 관한 이야기다.


“ 이스라엘 민족의 대변자였던 모세는 그와 함께 새로운 민족이 시작되고 옛 이스라엘 민족은 멸족되게 하라는 신의 명령을 두 번이나 거절한 인물이지만 바울은 그 명령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16 “


“ 바울 – 모세의 비교는 바울 자신이 직접 억지로 만든 겁니다. 그러니까 저의 테제는 그리스도교의 근원은 본디 예수가 아니라 바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97 “


그 ‘명령’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타우베스가 꼼꼼하고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바울 독해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로마서를 읽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수가 인정한 사도가 아니었던 바울은 누군가 임명자를 선택해야만 했다. 우선 사도가 되어야만 했다.


“ 나 바울은 사도직을 사람에게나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받았습니다. 갈 1 : 1- 2


이제 스스로 사도가 된 바울은 본격적으로 세계선교를 시작하고 주된 선교대상으로 로마를 설정하고 로마에 있는 공동체에 서한을 보낸다.


“ 잘못 읽힐 수도 있고 또 누구 손에 들어가게 될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바울이 로마 공동체에 이런 편지를 보낸 것은 정치적 선전포고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 중략 “ 이러한 의미에서 로마서는 정치신학이며 카이사르에 대한 정치적 선전포고다 “ 45


로마서에서 바울은 당시 ‘허용된 종교’를 누렸던 그리스도 로마 공동체에 도전적인 발언을 한다.


“ 즉 지배자 [황제]는 노모스가 아니라, 노모스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 (예수 그리스도)이라고 말한 겁니다. 이건 정말이지 엄청난 것이죠 63  “


새로운 공동체, 유대주의의 혈연의 공동체가 아니라 새로운 약속의 공동체의 토대를 만들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일, 이것이 바울의 사명이다. 메시아 처형의 죄를 지은 백성 때문에 사명이 생긴 바울은 이스라엘을 질투하게 만들기 위해 이방인을 끌어들인다. 할례에 대한 바울의 태도가 그 한 사례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인정받은 것은 할례 전이라는 바울의 진술은 그가 유대교 전통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결국 유대교를 넘어서려는 사명에 충실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 노모스, 율법의 파계, 새로운 약속의 시대에 대한 바울의 선전


* 일부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은 완고하지만 모든 이방인들이 하느님께 돌아오는 날에는 그 완고한 마음을 버릴 것이고 따라서 범이스라엘도 구원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1: 25-26, 바울을 움직이게 만든 변증법

* 예수의 두 가지 사랑과 바울의 한 가지 사랑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두 개의 계율이 아니라 단 하나의 계율. 혁명적 행위. 128


* 바울이 이중 계율을 한 가지로 환원한 것, 바울의 영지주의적 특성과 연결. 창조는 신약성서에서 아무런 역할도 못한다. 신약에는 구원만. (마르치온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하늘과 따의 창조주가 아니었다.


* 즉 프로이트는 바울의 직계 후손이라는 것이지요. 207


* “ 그러다 마침내 유대 민족 출신의 한 사람이 새 종교 (그리스도교)를 분리시키면서, 한 정치적/종교적 선동가를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동인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타르소 출신의 로마의 유대인 바울은 이러한 죄의식을 들먹거리면서, 이것이 원시사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올바르게 파악했다 211


결론적으로 타우베스는 “ 이 강연에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라는 양극의 대립으로 인해 경직화된 사유의 형식을 폭파시켜 버린다. 그리스도교가 (율) 법으로부터 해방된 영적인 종교성을 독점한 게 아니며, 마찬가지로 유대교 역시 전례에 기반한 종교성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이 두 종교에는 모종의 변증법이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 243        


신학자가 아니라서 이와 유사한 수준과 내용의 글이 얼마나 많이 번역되어 있는지 모르지만 최근에 읽은 신학 관련 서적 중에서는 가장 의미 있는 독서로 남는다.


근데, 이런 류의 신학 책을 읽고도 '믿음'이 온전히 지켜질까? 이미 '구원'은 끝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일까?  


++

p.s 네이버 블로그에 2014. 1. 14. 22:56 에 쓴 글. 시간날 때마다 브런치로 옮기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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