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의 마가복음 강해
십몇 년 전 도올의 [논어 한글역주]를 즐겁게 읽은 적이 있다. 동양철학 전공자로서의 스칼라쉽이 제대로 발휘된 것 같아 좋았고 감사했다. 그 이후로 효경, 대학, 중용, 맹자 등을 계속 역주했고 나올 때마다 거의 사서 읽었다. 그리고 속으로 희망했다. 도올 스스로 약속한 동방 고전 13경 한글역주가 다 출간되었으면 좋겠다고. 불행히도 현재 맹자에서 멈췄다. 물론 도올은 동방 고전 역주 대신 여러 권의 책들을 계속 출간했다. 워낙 열정적인 사람이라 잠시라도 쉬질 않고 계속 쓰고 강연하고 여행하고 또 쓰기를 반복한다. 관심의 영역이 너무 넓다. 다 좋은데 이미 적지 않은 나이다. 인간의 시간은 그 한계가 정해져 있다. 이제 그만 '다른 일' 들은 정리하고 남은 13경 작업 끝냈으면 좋겠다. 개인적인 소망이다.
2019년 단체 생활을 하면서 독서를 거의 못했다. 많이 바쁘거나 힘든 것도 아닌데 독서할 시간과 여유를 갖지 못했다. 기왕에 사놓은 책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계속 입안에 가시가 돋기 시작했다. 마침 신문을 보다가 도올의 신간 소식을 듣고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다. [도올의 마가복음 강해]. 가볍게 읽기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계기로 다시 책 좀 열심히 봐야겠다, 고 마음먹었다. 이 목적은 일부 달성했다. 그러나 도올 책 – 동방 고전은 제외하고- 은 이제 그만 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보다 어린 시절에는 도올의 장광설이 그저 좋았다. 근거 있는 해박함이 신선했고 가끔 존경스럽기도 했다. 배운 것도 많았다. 이제 나이가 좀 들다 보니 말 많은 사람보다 간결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더 좋아지기 시작했다. 도올은 여전히 말이 많다. 마가를 읽었는지, 요한, 도마를 읽었는지 구분이 잘 안 간다. 원본에 집중했으면 좋겠는데 본인의 이야기도 많고 설명도 중복적일 때가 많다. 읽다 보면 도올의 예전 저서에서 본 것 같은 내용들이 여럿 나온다. ‘강해’의 속성에 그런 측면도 있겠지만 독서라는 행위에 그다지 어울리지는 않는 방식이다. 이제 예수의 역할은 포기하고 격조 높은 철학자로 만족했으면 좋겠다. 내 작은 희망이다.
마가복음에 대한 도올의 생각은 심플하다. 마가복음은 마가시대로 돌아가서 판소리 듣듯 그렇게 당시 민중의 심정으로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가복음은 인류사상 최초로 등장한, 유앙겔리온이라고 하는 유니크한 문학 장르이다. 바울이 예수의 죽음을 선포하는 유앙겔리온의 선포자였다면 마가는 예수의 삶을 선포하는 유앙겔리온을 선포했다. 마가의 유앙겔리온은 이야기였고 감동이었고 드라마였다. P 73
중간중간 좋은 내용들이 많다. 특히 씨 뿌리는 비유에 대한 해석은 참신했다.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마가복음 4장)
대부분 목사들은 이 비유를 설교할 때 말씀을 잘 받을 수 있게 마음의 상태를 옥토로 만들어 놓으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세상에 씨 뿌릴 때 일부러 길 가에 뿌리는 사람은 없다. 씨를 뿌릴 환경을 만든 다음 씨를 뿌린다. 중요한 것은 밭이 아니라 씨를 뿌리는 행위와 그 주체다. 씨가 던져지는 시공간의 미래를 인간은 알 수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주체적 결단과 행위가 있어야 한다. 모험을 하는 사람에게만 시공간은 그 속을 보여 준다.
베드로의 고백을 해석한 부분도 좋았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마가복음 8장)
베드로를 정통 라인으로 내세우는 계파의 이권이 개입된 발언. 마가복음이라는 원형적 기술에는 일체 교회 운운하는 개구라도 없고, 베드로의 고백을 인간으로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신적인 깨달음이라고 인가해주는 예수의 발언은 개코만큼도 없다. P 427
그 외 좋은 내용 몇 개 인용해 둔다.
“기독교의 역사는 예수의 동방적 요소의 참신함을 초대교회의 케리그마에 의하여 유대화하고 율법화하고 초월주의화하고 종말론화하고 실재론화하는 왜곡의 역사였다. P 345
“종말론은 대체적으로 신구약간시대의 어두운 현실 속에서 근동 문명의 “빛과 어둠”이라는 이원론적 사유를 배경으로 생겨난 것이다” p 164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얼마든지 구라를 쳐도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라를 쳐도 기본은 알고 쳐야 한다는 것이다” p 261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용하고 싶은 문장. 도올의 구라는 언제나 즐겁다.
나의 설교 내용은 하바드나 시카고 신과대학원에서 소수정예 엘리트와 세미나를 할 그런 수준의 내용이다. 그런데 이 한국땅에서는 그러한 수준의 2시간짜리 학술세미나가 민중의 심령을 울리는 설교로서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 아멘 p 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