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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열 Jan 27. 2020

늘 꿈꾸지만 결코 갈 수 없는 곳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오래전에 읽었는데 별 기억이 없다. 사실 대부분의 책들이 그렇다. 책의 스토리 또는 책에서 얻은 지식은 의식 저 깊은 곳에 먼지처럼 가라앉아 있다가 불쑥 뛰어나오기도 하고 그저 소멸되기도 한다. 그래서 다시 읽을 때는 전혀 다른 책이 되기도 한다. 그 사이 독자도 변해있기 마련이다. 새 경험이 좋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대부분은 지루한 경우가 태반이다.


일이 생겨 유토피아를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1516년에 출간된 책이다. 오래된 서양 책을 읽을 때마다 동시대 한반도를 생각하게 된다. 임진왜란 이전 중종시대다. 유럽은 이미 근대적 사고의 틀이 형성되어 있었고 자본이 가져온 폐해가 커서 그 솔루션을 고민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이 시기 조선에서는 홍길동이 등장해서 탐관오리를 징치하고 백성들의 영웅으로 환영받고 있었다. 두 공간의 서로 다른 시간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이야기는 나중 다른 독후감에서  좀 더 서술하기로 하자.


토마스 모어가 이 책을 쓴 시기는 대항해 시대의 절정기였다. 상업자본주의가 본격화되면서 화폐경제가 일상화되기 시작했다. 이전 봉건제 시대와는 전혀 다른 사회였다. 새로운 것도, 편리한 것도 계속 생겨났고, 모든 것이 가능해 보였다. 문제는 돈이었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해 보였다. 이제 돈이 야훼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돈이 사람에게 주인 노릇하기 시작하면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현상이 노정되었다. 대항해의 혜택은 소수 몇 사람에게만 해당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현실은 디스토피아였다.


“사유재산이 있는 곳, 그리고 돈으로 모든 것이 평가되는 곳에서는 나라가 정의롭고 번성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 p 58


단호하다. 사유재산과 사회적 정의는 양립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도 동일하다.


"부르주아지는 인간의 존엄을 교환가치로 녹여 버렸고, 인간의 자유를 단 하나의 파렴치한 상거래의 자유로 대체했다"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중


모어는 그 대안으로 유토피아를 상정한다. 그곳에서는 최소한의 법률로 협치 되며 모든 것을 평등하게 나누어 갖는다. 노예도 있고 종교도 있고 중세적 도덕도 있지만 – 혼전 성교 처벌 같은- 돈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사용가치로만 교환한다. 이 정도가 모어의 최대치였을 것 같다. 영국 왕의 충실한 신하요, 신실한 신앙인인 모어의 인문학적 상상력이 창조한 유토피아는. 모어 이후 많은 이상주의자들이 등장했고 계속 더 과격하고 근본적인 솔루션들이 등장했고 그 절정에 마르크스도 한 자리 차지하고 있다.


어차피 혁명이 불가능하다면 모어도 고려할 수 있겠지만 우리 시대가 너무 복잡해졌고 너무 커졌다. 가끔 이런 책이나 읽으면서 세상을 여유롭게 사는 것이 그나마 위로받는 길이 아닐까 싶다.


끝으로 하나, 유토피아에서는 맞선 볼 때 중매자 입회 하에 서로의 알몸을 보여준단다. 토마스 모어를 인문주의자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서 명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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