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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열 Dec 13. 2020

누가 노자이고 누가 도올인지   

노자가 옳았다  [ 양장 ] 김용옥 저 | 통나무 | 2020년 10월


오래전 도올의 논어 한글역주를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난다. 공자가 살던 당대의 시대상과 논어를 연결시켜 해석했고 그러한 현실적 적합성이 독서를 편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서평도 나름 근사하게 썼다. 그래서 어느 정도 기대했다. 이 책 역시 어떤 즐거움을 줄 것이라고. 


모든 글은 - 이 책처럼 노자를 해석한 책이든 또는 복음서를 주해한 책이든 또는 문학평론이든 간에 - 결국 자신의 이야기 일수밖에 없다. 도올은 노자를 도올 나름대로 해석했고 그래서 그 결과 "노자가 옳았다"라고 선언하고 있지만 노자의 도덕경은 결국 오래전에 쓰인 동양 고전 중 하나다. 노자 당대에 노자에게 관심이 있는 여러 사회적 현상들이 있고 그 현상들 이면에 있는 구조적인 문제들을  노자의 관점에서 기술한 것이 노자의 도덕경이다. 당연히 지금 관점에서 보면 와 닿지 않는 것도 있고 납득 자체가 힘든 것도 있을 수 있다. 이천 오륙백 년 전에 쓰인 글이 지금 현대인들에게 가까이 다가오기는 힘들다. 노자가 세상 모든 진리에 통달해 자신의 메시지를 시공간을 초월해 모두에게 뿌려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오래전 죽은 노자 또는 여럿 중 하나인 노자를 부활시킨 것은 도올이다. 그러나 부화한 것은 노자가 아니라 다시 도올이다. 도올은 노자의 입을 빌어 도올이 옳았다 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스무 살 때 노자를 만나 영감을 받았고 이후 동양철학에 대한 공부로 일생을 보냈고 이제 나이 칠십이 넘어 인생을 관조하는 지경에 이르고 보니, 열심히 공부했고 많은 것을 알고 세상 이치를 꿰뚫어 볼 줄 알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관심과 존경을 받는 자신의 삶이 꽤 괜찮다는 이야기를 노자를 통해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자긍심 자체는 좋다. 옳다고까지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좋다고 이야기할 수는 있다. 그런데 좀 과하다는 느낌이 든다. 첫 장부터 끝 부분까지 계속 반복된다. 노자를 통한 도올의 완벽성이 지루하게 반복되고 있다. 고요함으로써 자기를 낮춘다고 노자에 나와 있는데 그런 실천 의식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성현의 말씀' 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숭배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비판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식의 강요가 계속 느껴진다. 


"나의 논의가 다소 래디컬한 것일 수도 있으나 "진보주의, 자유의 증대, 군사 폭력의 근원적 해소" 운운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외치는 반군감정 Anti-army sentiments은 우리 국가사회를 근원적으로 좀먹는 망발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자유니 진보니 하는 썩어빠진 서구적 가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중략-종교적 자유도 사회적 해악을 끼칠 때는 가차 없이 제약을 가해야 하는 것이다. p 287"


도올이 노자를 고조선의 사상가라고 느낀다고 말했을 때 몇몇 사람들이 도올을 부정적으로 묘사했지만 난 도올이 그리 생각할 수도 있다고 봤다.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 느낌마저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위 문장을 보고 나서는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노자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극단적 주장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  동양철학자에서 어느새 성현이 되었다고 생각한 걸까. 노자를, 도올을 강조하다가 잠깐 오버한 것일까. 


대부분 동양철학의 책들처럼 이 책 역시 한번 덮고 나면 그 내용이 생각 안 날 것 같다. 단지 어떤 느낌은 남을 수 있는데 그 느낌이 그리 신선하지는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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