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홍열 Dec 29. 2020

두 신학자가 복원한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 마르쿠스 보그 , 존 도미닉 크로산 



십자가 처형은 금요일에 이루어졌다. 부활은 일요일에 일어났다. 처형 전 예루살렘 입성은 부활 일주일 전 일요일에 일어난 사건이다. 예수는 일요일에 예루살렘에 들어와 화요일에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예언하고 목요일에는 최후의 만찬을, 금요일 오전에 심판을 받고 오후에 십자가 처형을 당한다. 


이 일주일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없었다.  기독교는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이 만든 종교다. 탄생은 누구에게나 있는 자연적 현상이고 본인이 선택할 수 없는 영역이다. 죽음은 다르다. 죽음의 시기와 방법을 선택할 수 있고 그 내용이 극적일수록 드라마의 완성도가 높다. 예수는 이 일주일을 밀도 높게 구성했다. 마지막 처형까지 예상하고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가열하게 보냈다. 흔히 믿어지는 부활, "난 죽지 않아. 죽어서도 살아날 거야 " 하는 시나리오는 처음부터 없었다. 저자들은 분명하게 말한다. 부활은 그리고 그 많은 기적들은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비유라고. 


" 부활의 이야기들은 비유로 본다고 해서 반드시 그 이야기들의 사실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 문제는 보류해 놓는 것이 좋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이 야기들의 중요성은 그 의미에 있다는 것이다. p 271 


육체적으로 부활했느냐 하는 것은 나중에 혹은 개인적 믿음 영역에 보관하고 여기서는 그 의미에 대하여, 무엇을 비유하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하자고 말한다. 저자들은 육체적 부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는다. 왜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했는지 그 의미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를 따르는 이유라고 말하고 있다. 


서기 30년 어느 봄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두 행렬이 있었다. 첫 번째 행렬은 초라한 행렬이었으며 다른 행렬은 로마 군대의 행렬이었다. - 중략- 예수의 행렬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었으며 빌라도의 행렬은 제국의 권력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p 16-17 


예루살렘의 승자는 하나여야 한다. 오랜 기간 야훼의 성소였고 하나님의 정의가 살아 숨 쉬는 곳이었던 이 곳에 로마의 제국 신학이 점령해서 이제 주인이 되었다. 그 로마에 맞짱 뜨기 위해 나귀를 타고 농부들의 환호를 받으며 예수가 등장했다. 일종의 시위다. 사전에 계획된 시위다. 사람이 많아야 한다. 하나님의 신학, 정의의 신학을 선포하기 위해서다. 출정했으면 이겨야 한다. 종려주일의 그 화려한 퍼포먼스 이후 예수는 더 담대한 이벤트를 한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마가복음 11장  

  

예수의 이런 행동을 두 신학자는 이렇게 해설한다. 


이미 현존하는 로마제국의 권력과 이미 현존하는 유대교 대제사장의 로마를 위한 협력에 맞서 이미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다. p 88 


예수가 감히 로마에, 감히 기득권 세력에 대항한다. 무기도 조직화된 군중도 없다. 그저 어렵고 힘든 군중들과 늘 답답한 제자들 뿐이다. 성전도, 질서도, 현실도 전부 새로 시작되어야 한다. 이제 나는 죽는다. 목숨을 걸고 새나라를 선포한다. 그 길에 함께 동참하면 새 하늘과 새 땅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열정 passion과 수난 passion 은 같은 단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분배적 정의에 대한 첫 번째 passion 열망이었으며 그런 passion 열망은 필연적으로 빌라도의 사법적 재판에 의한 두 번째 passion 수난으로 연결되었다. 9   


십자가 처형이 선고되고 제자들은 다 떠나간다. 이제 죽음, 마지막 절망의 시간을 혼자 정면으로 응시해야 한다. 내 죽음은 죽음에서 끝나지 않는다. 내가 선포한 분배의 정의, 정의의 신학은 이제 비로소 시작된다. 죽으면서 시작된다. 내가 죽는 것은 누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지배권력의 파탄을 드러내는 것이고, 변화의 길에 대한 예시이며,  결국 지배권력을 이긴 것이다. 


두 신학자는 마가 - 복음서의 첫 저자- 를 통해 일주일의 스토리를 재구성한다. 주제는 예수의 길, 예수의 마지막 길이다. 그 길이 무척 험하고 목숨까지 필요한 길이지만 예수는 걸었고 마가는 그 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했다. 그 기록이 복음으로 이어졌고 그 후 예수의 길을 걷는 것이 우리 모두의 신앙이라고 이야기한다. 


++


이 책, 절판이라 온라인 구매는 불가. 출판사에 전화 걸어 보관용 있느냐고 물어봤더니 없다고 하고. 나중 온라인 중고 서점에서 구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끔 운이 나쁠 때도 있지, 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