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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엘 카스텔과 새뮤얼 헌팅턴의 서자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 프랜시스 후쿠야마

by 김홍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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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제목은 Identity, 정체성이다. 작년에 올라온 페친의 간략한 독후감을 보고 구매했다. 뭔가 있어 보였다. 출판연도를 보니 원서는 2018년, 번역본 초판은 2020년이다. 작년에 나온 책인 줄 알았는데 이미 오래된 책이었다. 그래도 샀으니 읽어 보기로 했다.


인간을 움직이는 또 다른 강력한 동기는 남들에게 뒤지지 않게, 남들과 동등하게 인정받으려는 '대등 욕망'이다. - 중략 - 근대 민주주의의 탄생 과정은 우월 욕망이 밀려나고 그 자리가 대등 욕망으로 대체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50


후쿠야마가 말하는 정체성이 바로 이 대등욕망이다. 정체성은 민족 또는 집단 안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고정된 어떤 특성이 아니고 시기마다 의식되는 상대적 자기 인식이다.


이들 나라의 국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목격된 것은 정부에게 불평등한 대우를 받고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분노였다. 83


이들 나라는 2010년 튀니지였고 2011년 이집트였다. 2013~2014년 우크라이나의 반정부 시위는 '존엄성 혁명'으로 명칭 되기도 했다.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집단/계급/계층이 존엄성 인정을 정치적으로 요구하는 것 그리고 이 요구에 대한 정치/정치가들의 대응이 현대 정치의 중요한 특성이라는 것이다. 이 책 한글제목이 '존중받자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좀 더 최근 사례를 살펴보자


이 같은 일들보다 더 놀랍고 어쩌면 훨씬 더 중대한 의미를 내포한 사건은 2016년 두 가지 투표 결과였다. 즉 유럽연합 탈퇴를 결정한 영국의 투표, 그리고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이라는 미국 대선 결과다. 25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 중 하나는 이민자들의 대량유입에 따른 반감이라는 것이다. 이민자들이 본국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오랜 세월에 걸쳐 확립된 문화적 정체성을 훼손했다고 판단한 사람들의 투표결과라는 것이다. 정체성 훼손은 단지 문화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결과적으로 '대등 욕망'의 훼손으로 연결되어 자신의 사회에서 자신이 존중받지 못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트럼프는 이 실종된 욕망을 회복시켜 주겠다고 선동했고 욕망을 상실당한 사람들은 투표로 화답했다.


이 책의 앞부분은 이 정체성에 대한 역사적, 철학적 설명과 분석으로 채워 저 있다. 고대 그리스부터 시작한다. 투모스(격정, 기개)를 정체성 정치의 기원으로 보고 투모스에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무슨 이야기를 하든 서구의 사회과학자/철학자들의 서사는 그리스부터 시작해서 르네상스, 근대를 거처 현대로 연결된다.


욕구와 이성은 인간 영혼을 구성하는 부분들이지만 세 번째 부분인 투모스는 그 둘과 완전히 구분되어 별도로 작동한다. 투모스는 가치의 판단이 일어나는 곳이다. - 중략 - 영혼의 이 세 번째 부분인 투모스는 오늘날 목격되는 정체성 정치와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48


생물학적 욕구도 아니고 합리적 판단도 아닌 그 무엇이 있고 그것이 무척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후쿠야마가 자신의 논지를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위하여 고대 그리스의 투모스를 끌고 온 것이다. 이후 투모스는 16세기 독일의 루터로 이어진다.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서구 세계에서 정체성 개념은 16세기 종교개혁 시기에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정체성 개념을 최초로 표현한 인물은 루터다. 57


투모스가 르네상스 이후 인간의 재발견 과정에서 루터에 의해 정체성으로 재구성되었다고 본 것이다. 루터의 종교적 정체성은 루소의 사회적 정체성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루소가 내적 자아를 종교의 테두리 너머에서 보편화하고 그것을 관습보다 더 중요하게 간주한 것은 현대적 의미의 정체성으로 넘어오는 중요한 디딤돌이다. 67


루터가 신 앞에서 내적 자아를 말했다면 루소는 세상과 직접 조응하는 개인의 정체성을 언급했다.


루소 이후 저자는 세계 여러 곳의 사례를 통해서 자신의 주장을 설파한다. 다 그럴듯하다. 이렇게 기본 분석틀을 설정하고 적절한 사례를 찾아 분석하면 대부분 다 적용될 수밖에 없다. 특히 트럼프와 유럽에서 우파의 등장을 설명하는 데에는 꽤 그럴듯해 보인다. 예를 들어 이런 문장들이다.


좌파의 정체성 정치는 희생 돼온 특정 집단들을 강조함으로써 미국적 정체성의 정당성을 약화시키려고 시도해 왔다. 때로는 인종차별과 성차별, 여타의 제도적 배타성이 미국의 DNA에 원래 들어 있다는 식의 수사를 전개하면서 말이다. 267


반면에 우파는 대등욕망의 좌절이 외부로부터 왔다고 특정집단들의 정서를 자극, 선동해서 정치적 영역을 확장시킨다. 이런 분석은 분명 장점이 있다. 팬데믹 당시 그리고 이후에 미국과 유럽의 경제 침체, 이민자 폭증, 불안한 미래, 직업 상실 등이 중첩되면서 글로벌 정치 환경이 우파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까지이다.


정체성은 헌팅톤의 문명의 충돌에서 나온 지역적 종교문화의 차이를 계층/계급의 불만으로 재구성해서 나온 결과물이다. 본질적으로 저자의 정체성과 헌팅톤의 종교문화는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정체성의 주체로 개인을 강조하지만 결국 사회적으로 표출되는 양상은 집단적 행위일 수밖에 없다.


정체성이 집단으로 표출되기 위해서는 네트워크라는 물리적 사회적 구성물이 선재해야 한다. 네트워크로 이래 정체성 정치가 가능해졌다는 인식은 당연히 카스텔에서 출발한다.


헌팅톤과 카스텔을 적당히 섞어서 현재 글로벌 정치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싶다는 것이 이 책 저자의 의도라고 볼 수 있다. 그냥 가볍게 보기에 적당한 책이다.


++

목차


서문 006

1장 존엄의 정치 021
2장 영혼의 세 번째 부분 035
3장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 055
4장 존엄성에서 민주주의로 073
5장 존엄성 혁명 081
6장 표현적 개인주의 093
7장 민족주의와 종교 107
8장 잘못 배달된 편지 129
9장 보이지 않는 인간 139
10장 존엄성의 대중화 155
11장 정체성에서 정체성들로 175
12장 국민 정체성 203
13장 국민의식을 위한 내러티브 225
14장 무엇을 할 것인가 257

주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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