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열의 디지털 콘서트
그동안 테스트 또는 전시용으로만 이용되던 두 다리 보행 로봇이 처음으로 산업 현장에 배치되어 업무를 시작했다. 미국의 로봇 개발 업체 어질리티 로보틱스(Agility Robotics)는 자사가 개발한 이족보행 로봇 디지트(Digit)가 코네티컷주에 위치한 속옷 제조 기업 스팽스(Spanx)에서 첫 근무를 시작했다고 지난달 27일 보도했다. 키 175cm, 무게 63.5kg의 늘씬한 신입직원 디지트에게 주어진 첫 번째 임무는 물류창고에서 의류 상자를 운반하는 일이다. 자율이동로봇에 실려 오는 의류 상자를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려놓는 단순한 일이다. 전 직장 경력이 없는 신입직원 업무로서는 적절해 보인다.
디지트의 고향은 어질리티 로보틱스이지만 소속은 물류 시스템 공급업체인 지엑스오 로지스틱스(GXO)다. 디지트는 스팽스로 파견되기 전 지엑스오 로지스틱스에서 충분한 인턴 과정을 거쳤다. 스팽스에 가서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있도록 지엑스오 로지스틱스 물류창고에서 유사 업무를 익혔고 어느 정도 숙련되었다고 판단된 후에 스팽스에 공식적으로 파견 나간 것이다. 이제 디지트와 같은 이족보행 로봇들에게 더 많은 일자리가 주어질지는 디지트에게 달려 있다. 물론 어질리티 로보틱스와 지엑스오 로지스틱스는 디지트의 업무 능력을 믿고 있고 이족보행 로봇의 미래에 대하여 낙관하고 있다.
어질리티 로보틱스의 이족보행 로봇 디지트(Digit)가 미국의 한 속옷업체 물류창고에 신입 직원으로 투입됐다. (사진=어질리티 로보틱스 제공)
이런 희망사항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디지트의 능력이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디지트가 제대로 일할 수 있게 환경을 만들어 주는 일이다. 인간 노동자의 근무환경은 급여, 노동시간, 휴게, 복지, 상사와의 관계 등 다양하고 복합적이지만 로봇 디지터의 근무환경은 아주 단순하다. 디지트가 제대로 일할 수 있게 표준화된 시스템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또는 더 잘 만들어주는 것이다. 디지트는 자신에게 최적화된 표준화된 환경에서는 24시간 능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시스템의 일부라도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면 이내 무기력해진다. 문제 발생 시 학습을 통해 어느 정도 개선될 수는 있지만, 전혀 다른 문제가 발생하면 이전 학습은 소용없는 일이 된다.
사실 이런 표준화의 문제는 비단 디지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산업 현장에서 요구되는 기본원칙이다. 산업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표준화에 있다. 산업혁명 이전 가내수공업에서 공장제수공업을 거쳐 기계제대공업에 이르는 과정은 표준화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표준화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자본 역시 축적되기 시작했고 더 많은 자본 획득을 위해서는 계획적이고 항구적인 생산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기업은 효율적 생산관리를 위해 모든 생산과정을 표준화하고 그에 맞게 원재료와 노동을 배치하고 노동과정을 정교하게 설계했고 매뉴얼화해서 보급했다.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현대 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킨 배경 역시 인터넷 프로토콜(IP)의 표준화, 웹 기술의 표준화, 데이터 형식의 표준화 등이 전제되어 있다. 표준을 만들고 표준화에 성공한 기업, 제품들은 살아남았고 그렇지 못한 기업이나 제품은 이내 사라져 버렸다. 신입 직원 디지트의 미래도 바로 여기 표준화에 달려 있다. 주변 환경이 도와주지 못하면 디지트의 능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디지트 머리에 최첨단 생성형 인공지능이 탑재되어 있고, 인간의 육체와 같은 부드러운 관절과 유연한 허리가 있다 해도 표준 시스템이 지원되지 못하면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되고 결국 용도 폐기될 수밖에 없다.
어질리티 로보틱스의 이족보행 로봇 디지트(Digit)가 미국의 한 속옷업체 물류창고에 신입 직원으로 투입됐다. (사진=어질리티 로보틱스 제공)
지엑스오 로지스틱스는 디지트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 기존 인간 중심의 물류 업무 중 일부를 디지트에 맞게 개선했다. 그동안 대부분의 생산 공장이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하여 사실상 무인공장으로 전환되었지만, 물류 부분에서 자동화가 늦어진 이유는 인간 노동이 필요한 부분이 많아서였다. 생산공장의 경우 시장 상황을 고려하여 어느 정도 생산할 것인지를 예측하고 적당량의 재료와 부품을 투입하면 미리 세팅된 시스템이 결과물을 산출하지만, 물류창고는 상황이 다를 수밖에 없다. 물류창고는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제품을 다루어야 하며, 물동량이 수시로 변화고, 고객의 갑작스러운 요구에 맞춰 빠르게 대응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이유로 인해 물류 업무에 자동화 시스템을 구축,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이 커서 계속 인간 노동을 활용해 왔다. 그러나 이제 온라인 쇼핑이 비중이 커지면서 물동량이 계속 늘어나고 인건비 역시 상승하면서 디지트가 일할 조건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기업들은 이족보행 로봇을 투입해 인간 노동의 일부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신입직원 디지트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디지트의 등장은 이제부터 인간 노동의 많은 부분이 표준화를 통해 자동화로 이월되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류 업무의 표준화는 시작일 뿐이다. 인간 노동의 여러 업무가 표준화를 기다리고 있어 디지트의 성공 여부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