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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에 대한 다큐적 대답

사주는 없다.

by 김홍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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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책 제목을 봤을 때 이런 내용일 거라고 예단했다.


"AI시대에는 이런 올드한 구라가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 지금은 스스로 학습하는 생성형 AI가 인간의 미래를 데이터에 기초해서 적절하게 분석하고 합리적 솔루션을 제안하는 시대다"


이런 예단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저자는 아주 진지하게 - 웃음기 빼고 - 사주의 비합리성을 통렬히 비판한다.


사주명리학 신봉자라고 불러도 좋을 그들에게는 한 가지 두드러진 공통점이 있었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합리적 근거를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 중략- 그들은 근거에 대한 어떤 의문이나 고민도 없이 자신의 경험을 간증처럼 소개하면서 사주명리학을 과대 포장하고 있었다, 10


사주만 보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주장은 사주 귀신에 씌어서 이성을 잃은 자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28


첫째 사주를 구성하는 여덟 글자 간지가 우주의 기운을 나타낸다는 기본적인 전제가 증명되지 않았다.

둘째 사주 여덟 글자와 실제 삶의 인과적 연관성이 증명되지 않았다.

셋째 개인의 경험이나 관점에 좌우되지 않는 사주 풀이의 논리적 정합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59


저자는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역법의 역사적 변천과정 (과 다양한 역법의 존재)을 설명하면서


어떤 역법에 따른 간지가 진정한 우주의 기운을 나타내는 것일까? 우주의 기운은 사람이 만드는 역법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사주를 믿는다는 말은 역법을 만든 사람을 믿는다는 뜻이 된다. 정약용이 설파했듯이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43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조용헌, 고미숙, 강헌, 양창순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근거에 대한 어떤 의문이나 고민도 없이 자신의 경험을 간증처럼 소개하면서 사주명리학을 과대 포장하는 사람들이라고.


사실 책 내용은 별 거 없다. 평범한 내용이다. 내가 관심 있었던 것은 저자의 집필 동기다. 저자는 독일에서 독일어교육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다. 꼭 그런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독일 박사라면 사주에 그렇게 진심으로 관심을 보일 것 같지 않는데 저자는 그렇지 않았다. 일단 진심이었고 그 다음에는 진심이 배반당하는 이유를 분석하고 싶어 했다. 일종의 회개 같은 심정이었던 것 같다. 분석해 보니 별 것 없더라,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저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주는 계속 있을 것이고,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사주에 의지할 것이다. 그중 몇 사람은 진심으로 믿겠지만, 대부분은 가볍게 넘길 것이다. 사주도, 점도, 신앙도 늘 그래왔다. 대부분의 일상에서 사주가 차지하는 비중은 작고 가볍다. 그 정도는 그냥 방임해도 괜찮다. 너무 다큐로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더 심각해 보일 수도 있다.


오늘, 로또나 한 장 살까?


++

목차

들어가며 ㆍ 5

1부 사주로 운명을 알 수 있다고?

518,400가지 ‘운명’ ㆍ 19

사주로 ‘나’를 알 수 있는가? ㆍ 25

사주가 통계일 수 없는 이유 ㆍ 29

엉터리 실험과 부실한 연구 ㆍ 33

사주가 맞는 이유 ㆍ 39

2부 관념의 유희와 언어의 향연

자연의 기운이 운명을 결정한다는 명리학 ㆍ 49

한 번도 증명된 적 없는 사주 이론 ㆍ 53

관념에서 관념으로 이어진 천여 년 세월 ㆍ 58

IMF 이후 성큼성큼 양지로 ㆍ 65

환상 속에 번지는 ‘육십갑자 바이러스’ ㆍ 68

인문학의 탈을 쓴 ‘지적 사기’ 위험 ㆍ 73

3부 ‘글자가 운명을 결정한다’는 허망한 착각

실체를 찾을 수 없는 오행의 기원 ㆍ 79

오행이 하늘의 다섯 개 별이라는 허구 ㆍ 86

‘오행이 건강 좌우’ 의학적 근거 없어 ㆍ 94

허무맹랑한 오행의 상생과 상극 ㆍ 99

왕조 정당성 조작에 이용된 오행 ㆍ 106

하늘의 기운이 땅에서 작용한다고? ㆍ 112

올해와 아무 관련 없는 ‘올해의 운세’ ㆍ 122

십일신화로 소급되는 일주의 논리적 오류 ㆍ 129

시대마다 달력 달랐는데, 어떤 간지가 ‘참’인가 ㆍ 134

24절기의 과학성 & 사주가 과학이라는 주장 ㆍ 144

한 해의 시작은 사람이 정하기 나름인데, 웬 우주? ㆍ 149

서로 다른 하루의 시작 시간, 그럼 일주는? ㆍ 157

부모 없이 태어나는 팔자가 있다고? ㆍ 163

태어난 연월일시가 가족의 순서라고? ㆍ 169

역술가 따라 달라지는 운명, 무의미한 용신 ㆍ 178

4부 우주는 당신 인생에 개입하지 않는다

간지의 오행과 음양 ㆍ 195

‘천간 = 하늘의 기운, 지지 = 땅의 기운’ 인간의 설정일 뿐 ㆍ 196

팔자 중에서 여섯 글자는 오행과 관련 없어 ㆍ 206

설득력 없는 간지의 음양 변화 ㆍ 212

자연환경과 운명의 상관관계 ㆍ 218

출생 당시 자연환경이 ‘운명’을 결정한다는데 ㆍ 218

십이지지 속의 계절, 실제 계절과 안 맞아 ㆍ 222

우주의 에너지, 사주에 안 나타나 ㆍ 229

나가며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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