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와 근대
별생각 없이 책을 사는 경우가 꽤 있다. 대개 제목이 맘에 들 때다. 이 책 역시 그렇다. 제목이 맘에 들었다. 대충 이런 생각을 한 것 같다. 활자가 어떻게 조선의 근대화를 추동했을까. 활자와 근대라는 제목만 보고, 사회학도로서 늘 마음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근대’에 대한 문제의식이 발동한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 아쉬웠다. 활자가 조선 근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데, 소도구 취급만 받는 것이 아쉬웠다. 조선은 활자로 대변되는 인쇄, 언론, 커뮤니케이션은 받아들이지 않고, 활자 그 자체만 받아들였다. 조선의 마지막 왕조는 일부 개방적 측면도 보이지 있지만, 본질적으로 수구적 모습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서사가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내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독후감 쓸 때쯤 알았다. 우리는 이미 구한말 역사를 잘 알고 있다. 조정이 무력해서 주권은 이미 상실됐고 외세는 너무 강했다. 주체적 역량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근대가 아니라 근대의 향기도 맡아보기 어려웠던 시기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역사를 잘 알고 있는데도 별생각 없이 기대 한 것이다.
제목은 ‘활자와 근대’지만 근대는 없고 활자 이야기만 계속 나열되고 있다. 물론 일부 내용에는 신문의 광고를 설명하면서 무역, 상업, 마케팅에 대해 언급하지만, 근대의 맥락이 아니라 에피소드 차원에서 서술하고 있다. 그래도 이 책의 미덕은 많다. 당시 인쇄술과 출판문화에 관심 많은 사람들에게는 품질 높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읽다가 밑줄 친 몇 문장 소개한다.
1905년 부산상법회의소가 세워진 지 2년 만에 [조선신보]가 창간되었다. – 중략- 비록 일본 상업단체가 창간하기는 했지만, 여기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신문이 탄생한 곳이다. 75
주체가 중요하다면 한성순보가 맞고 발간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조선신보가 최초라는 이야기다.
(임오군란) 굶주린 군사들은 '식욕'문제를 해결하겠다면서 증오의 무기를 들고 일어났지만, 자신들의 절망적인 욕구가 조국의 멸망을 재촉한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146
물론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누가 그럴 수 있겠는가. 이런 식의 서술은 늘 불편하다.
지석영이 서적의 번각을 금지하자고 말한 대목도 주목할 만하다. 그가 저술활동의 창조성을 인식하고 출판권과 저작권의 보호라는 개념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요컨대 지석영은 창작행위와 그 창작물에 대한 근대적 의미의 지적소유권 개념을 이미 알고 있었다. 151
지적소유권 개념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박영효는 귀국할 때 일본에서 인쇄기와 활자를 구입했을 뿐만 아니라 신문을 창간하기 위해 신문기자와 인쇄기술자를 데리고 돌아오는데, 이들 근대 시설에서 깊은 영감을 얻었을 것이 틀림없다. 185
문명의 두 축은 기술과 미디어였다. 하나라도 제대로 도입되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후쿠자와가 조선에서 신문을 간행할 때 언문도 사용할 것을 권도했다는 증언이 남아 있는 것처럼, 유길준이 후쿠자와의 뜻을 받들어 신문 창간을 준비하면서 국한문 혼용체로 글을 썼을 개연성도 있다. 229
혼용체로 쓰인 창간취지서 작자가 유길준일 가능성이 있다는 전제하에 쓴 글. 후쿠자와의 통찰력이 엿보인다.
한성주보 제4호에 실린 '덕상세창양행고백'은 국내 최초의 신문광고로 손꼽힌다. 317
덕상은 독일 무역상을 말한다. 광고 대신 고백이라는 표현이 재미있다.
++
목차
들어가는 말_ 복수의 지식들이 경쟁하는 세계
1부 동아시아 근대의 활자문화 공간
1장_ 윌리엄 갬블과 동아시아 활자문화
2장_ 근대 출판의 기원, 쓰키치활판제조소
3장_ 쓰시마와 부산, 언어와 문학의 공동체
4장_ 국경을 넘나든 활자의 여행
2부 김옥균과 박영효가 꿈꾼 나라
1장_ 굶주림의 반란, 왕조의 황혼
2장_ 문명개화를 위한 차관 17만 원
3장_ 활자와 인쇄기, 현해탄을 건너다
3부 박문국과 동시성의 커뮤니케이션
1장_ 유길준, 신문 창간사를 쓰다
2장_ 널리 세상의 이치를 배우다
3장_ 『한성순보』, 논란의 중심에 서다
4장_ 불타는 박문국, 혁명정치의 파산
5장_ 백성들의 눈과 귀가 되다
6장_ 국한문체와 민족어의 재발견
4부 지식과 상품이 모이고 퍼지다
1장_ 상품과 광고, 자본을 전파하다
2장_ 지식의 생산과 소비를 조직하다
3장_ 국립출판사 박문국의 빛나는 시절
4장_ 문명개화의 서글픈 종말
5장_ 광인사와 근대 출판의 길
5부 기원과 신화
1장_ 활자와 근대 433
2장_ 신문과 근대 452
나오는 말_ 의미의 탐구는 멈추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