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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열 Feb 23. 2016

정본 백석 시집

나타샤는 자야가 되고 자야는 밤새 그 눈 길을 걷고 


오랜만에 ‘옛 시인’의 시를 읽었다. 이런저런 기회에 백석의 시 서너 편은 본 적 있지만 그의 시 전부를 차분하게 음미한 것은 이 번이 처음이다. 이 정도의 내재율은 공부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시적 감수성, 언어에 대한 천부적 감성이 있어야 가능하다. 백석의 시 어느 하나라도 머리에서 나온 것이 없다. 그저 흥얼거리다가 멜로디가 되고 노래가 되는  것처럼 어느 풍경을 보면 그 풍경에 적절한 평안도 방언이  튀어나오고 앞 뒤로 부사와 조사가 붙으면서 한 편의 시가 된다. 그 과정이 너무 자연스럽다.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녯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시 ‘여승’의  앞부분)


오래전 지아비를 잃은 한 여인이 어린 딸아이를 절에 맡겼고 그 아이는 여승이 되었다. 도라지꽃을 좋아하던 그 아이는 머리카락을 자르고 이제는 오지 않는 엄니를 기다리며 절 마당 석탑처럼, 불상 앞 불경처럼 그렇게 늙어갔다.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스토리가 있고 풍경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늘 여운이 있다. 백석 시의 결론 부분은 늘 다른 풍경을 향해 열려 있다.


손톱을 시펄하니 길우고 기나긴 창꽈쯔를 즐즐 끌고 싶었다.

만두꼬깔을 눌러쓰고 곰방대를 물고 가고 싶었다

이왕이면 향내 높은 취향리 돌배 움퍽움퍽 씹으며 머리채 츠렁츠렁

발굽을 차는 꾸낭과 가즈런히 쌍마차 몰아가고 싶었다  

(시 ‘안동’ 끝 부분)


‘안동’은 중국 요령성에 있는 단둥시의 옛 이름이다. 조선인 백석에게는 이국이다. 우리 식으로 하면 남미쯤 된다. 섹시한 이국풍의 여자와 오픈카를 타고  데이트하고 싶다는 이야기다. 한 곳에 정착하기 힘든 30대의 젊은 시인 백석의 작은 욕망이다. 같이 가고 싶은 여자가 없었나 보다. 안동에 가서 꾸낭과 데이트를 하고 싶었던 백석에게 여자가 생겼다. 이번에는 소련 여자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와 나타샤는

눈이 푹푹 샇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시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리 없다

언제 벌써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 것이다

시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전문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이 부분이 맘에 걸리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아름다운 풍경화다. 흰 당나귀를 타고 눈 속으로 날아가는 연인의 모습이 예쁘다. 물론 나타샤는 밤 새 오지 않을 것이고 빈 소주병은 늘어나겠지만 내가 나타샤를 사랑하고 있고 눈이 내리고 있으니 이 밤이 사랑스럽다.


나타샤는 자야가 되고 자야는 밤새 그 눈 길을 걸어 백석에게로 가고 있다. 길이 멀다. 백석은 기다리고 자야는 길을 걷고 있다. 계속 걷고 있다. 이승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걷고 기다리고 또 걷고 기다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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