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우린 SNS 를 켠다.
시험이 끝났다. 간만에 친구 집에 놀러가 TV를 켜니 설현이 등장하는 광고가 연달아 나왔다. ‘긴또깡’ 사건으로 인기는 떨어졌지만, 브랜드의 힘은 여전한가보다. 요즘 대세라는 ‘트와이스 치킨’을 시켰지만 브로마이드는 품절돼 받지 못했고, 치킨 맛은 기억에 남지 않았다. 요즘 유행이라는 오버워치를 하기 위해 PC방에 갔다. 입구에서부터 다양한 연예인들의 입간판이 우리를 맞이했다. 옆자리에서는 여자 연예인을 모방한 캐릭터가 반쯤 헐벗은 상태로 이곳 저곳을 바삐 뛰어다니며 총을 난사하고 있었다.
이렇듯 2016년의 우리는 연예인의 홍수에 빠져 살고 있다. 멀기만 하던 연예인이란 단어도 조금씩 우리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한경 경제용어사전은 연예인을 “최근 방송의 발전과 문화산업의 성장으로 연예인의 사회적 영향력이 커지면서 연예인을 직업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들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고 설명한다. 나아가 ‘개인 미디어’ 등의 등장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주변부터 먼 곳까지 촘촘하게 연예인 또는 연예인이 되고 싶어하는 이로 채워져 있다.
얼마전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를 보고 꽤나 놀랐다. 초등학생들도 SNS 안에서 서열을 매긴다는 것이었다. SNS 친구나 팔로워가 많은 사람이 또래 집단 내에서 보다 우대받고 소위 ‘페북 스타’ 대접을 받는다는 이야기다. 재미있는 점은 그 ‘친구’의 수가 같아도 질에 따라 대접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대개 인기가 많은 친구일수록, 또래보다는 나이 많은 친구일수록 질이 좋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들도 비슷하다. 보다 선망 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보다 선망 받는 사람과 가까이 하고 싶어 한다.
그러면 누군가가 선망 받는지는 어떻게 판단하냐고? 간단하다. 팔로워는 자신을 소비하는 이의 숫자다. 숫자가 커질수록 영향력이 생기는 거다. 더이상은 손글씨로 정성스럽게 쓴 팬레터의 수로, 굳이 명동이나 가로수길에 나가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단지 SNS 의 화면 속 숫자로 자신의 인기도를 수치화시켜 보여주니 얼마나 편한가.
개인 미디어의 세계는 더욱 불명확하다. 게임의 레벨을 올리려면 정해진 룰에 따라 꾸준히 노력하면 되지만 팔로워가 느는 데에는 룰이 없다. 흔히 정석으로 알려진 방법 중 하나는 좋은 콘텐트를 꾸준히 올려야 한다는 거다. 당연하지만 명확한 기준은 없다. 누군가는 좋아요 20만개를 받으면 전구를 씹어먹는다고 공약했고 다른 누군가는 락스를 마시겠다는 공약을 내세워 논란이 됐다. 소위 ‘페북 스타’ 두 명이 진행한 추격전은 그 과정에서 폭력적인 일이 자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후에 짜고 친 조작이라 밝혀졌다) 많은 SNS 유저들이 열광했다. 누군가는 롱보드 타는 동영상 하나를 올렸을 뿐인데 팔로워가 25만 명이 늘었고 화제의 인물이 됐다. 누구나 개인 미디어가 있는 시대의 이런 현상은 “그렇다면 혹시 나도?”와 “왜 나는?”을 교차시키며 욕망을 간지럽힌다.
우리의 아버지 세대만 해도 TV는 부의 상징이었고 간단한 정보를 얻기 위해 도서관을 줄창 들락날락거렸다. 하지만 이제는 이야기가 다르다. 미디어와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다. 사람들은 이제 페이스북 친구가 누른, 혹은 기업이 수백만원을 들여 광고하는, 페이스북의 알고리즘이 정해주는 정보로 가득찬 타임라인을 보고 멜론 차트 100을 소비한다. 누군가는 인스타그램 속 래퍼와 같은 브랜드의 옷을 입고 쇼미더머니에 출연하거나 아프리카 TV에서 생방송으로 ‘먹방’을 중계한다.
전에 없던 콘텐츠가 전보다 광범위한 방식으로 소비되는 새로운 시대다. 이걸 퇴보라 부르면 ‘문찌(문명 찌질이)’나 ‘아재’라고 놀림 받을 테지만 한편으로 여기서 가치 있는 것이 탄생해 온전히 전달, 소비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욕설이 난무하는 게임 방송, 좋아요를 갈구하는 ‘페북 스타’들과 제발 팔로우를 해달라고 댓글을 다는 일명 ‘페북 스타’ 지망생, 그들이 만들어내는 콘텐츠 속에서 우리는 지금 무엇을 소비하고 있는가. 지금 보이는 건 가치와 맥락은 사라지고 #얼스타그램 속 해맑은 가짜 미소와 유행하는 해쉬태그, 그리고 그것들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좋아요’ 아이콘을 누르는 사람들 뿐이다. 이는 우리가 지향하는 즐거움이 고작 그곳까지밖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