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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황 Sep 27. 2016

열아홉 살의 구조조정

그때 난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어쩐지 갑갑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독서실 보다는 구립 도서관이 공부하기에 좋아 자주 들렀더니 어느새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 안면이 있던 도서관 직원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학생! 이리 좀 와줄래요? 부탁이 있어서 그래요.

도착한 곳은 도서관 사무실. 나를 부른 직원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분이 내게 한 부탁은 바로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의 타당성 조사를 해달라는 것. 이유인즉 도서관 자체 사업이라 유료 참여자 수가 예상 인원보다 적으면 적자가 누적된다는 것이다. 자체 사업에는 정부 지원금도 나오지 않아 추가 예산 확보도 어렵다고 했다. 개설된 프로그램의 상당수가 우후죽순으로 개설된 것이라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궁금했다. 왜 그 일의 적격자가 하필 나일까.


"그런데 그 많은 이용자 중 굳이 왜 저를 고르셨나요."


"학생은 고 3인데도 여유가 있어 보여서."


반박할 수 없는 이유였기에 나는 얌전히 펜을 집어들었다.

세 분의 직원과 진행한 30분간의 회의 끝에 도서관에서 청소년 대상으로 추진하던 교육 사업 일곱 가지 중 네 가지가 사라졌다. 프로그램북에 펜으로 줄을 하나하나 그으며 내가 제시한 이유는 다양했고 현실적이었다.


학교 시험기간에 진행되는 강좌와 프로그램, 교과 과정에 나오지 않는 인문학 강좌, 현행 입시에 도움이 되지 않는 프로그램, 그리고 다양한 이유. 좋아하는 주제의 강좌였기에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다. 타당성 조사가 끝났다. 내 제안 덕에 수백만원의 예산이 절감됐다.


"정말 고마워요. 관장님께 바로 보고 드려야지."


"그럼 이 프로그램의 강사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아마 이번 계약을 못하지 않을까요."


"하하, 그런가요…"


말로만 듣던 구조조정이 이런 것이구나 싶어 허탈한 기분에 밖으로 나왔다. 그날따라 비가 무섭게 쏟아졌다. 도서관 입구에 서 쓴웃음을 지으며 내가 한 말을 곱씹었다.


"입시에 필요 없는 중국 문화 강좌."


"시험 기간과 겹쳐 수강할 수 없는 서양 고전"


누군가 비를 뚫고 내 옆을 지나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우산을 터는 그의 다른 손에는 익숙한 책이 들려 있었다. 너무나 유명해 외우다시피 했던 그 책의 첫 문장이 떠올랐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였다. 내가 지운 프로그램에 디킨스가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그날 공부는 거기서부터 글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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