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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쓴이 Oct 06. 2016

조금씩 다르지만 그것이 크게 다른 날들

그날말야 그날

왔다 왔다 또 그날이 와버렸다.

똥마려워 화장실에 갔는데 나오라는 똥은 안나오고 피가 벌겋게 묻어 나온다.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 디즈니월드 만화를 기다리며 급하게 간 화장실에서 이놈을 만나고 난 이후로 이 순간은 어쩜 익숙해지지 않는다. 어쩐지 요 며칠 쉽게 짜증이 나고 단것이 먹고 싶었다. 아니다. 내 자궁과 호르몬에게 나의 짜증과 식욕의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나는 이성적인 인간이라고 수없이 되뇌이지만 어쩔 수 없다. 앞으로 일주일은 여느 일상과는 조금씩 다르면서 그것들이 크게 다른 날이 계속 될 것이다.


예쁘게 꾸미고 싶어졌다.

비오는 날 끊어진 샌들 대신 홧김에 사버린 빨간 구두를 신어야지. 차마 구두가 망가질까 내 방 왕자 행거 밑에 고이 모셔둔 빨간 구두를 신고 출근을 한다.


'아닌데요' '아닌데요.'

회계팀 담당자는 말을 어쩜 이렇게 싹퉁바가지 없이 하는지, 머리를 한 대 콩 쥐어 박아 버리고 싶다. 지난번 검토건의 검토자가 당신이 아니냐는 질문이 이렇게 무례하게 대답을 하다니. 

저 여덟글자를 보고 나니 가슴이 컥 하고 막힌다. 어제는 부산에 물난리가 났다는데 오늘은 내 속에서 불이 끓는다. 어디보자 이럴 때는 어떻게 하는 거랬더라. 화가나면 뇌의 전두엽이 마비되고 파충류 처럼 본능만 남아있는 파충류 모드로 변한다는데* 한 마리 파충류가 되어 독을 뿜을까 하다 심호흡을 하고 화장실로 간다.


핸드폰에 몇 안되는 게임시작 버튼을 누른다. 내 몬스터들을 데리고 아무 생각없이 던전을 한판 돌고 나니 얻은건 경험치요 줄어든건 분노다. 작년에 간 길상사 템플 스테이에서는 모욕을 당했을 때는 그 모욕의 감정을 내 안의 그릇에 담아두지 않고 그냥 흐르는 물처럼 흘러 보내라고 배웠다. 그래, 놓아버리자. '아닌데요' '아닌데요'야 안녕


퉁퉁 부어오른 배의 말랑한 부분에 따뜻해진 핸드폰을 올려놓고 마사지를 한다. 발열된 핸드폰이 훌륭한 찜질기의 역할을 한다. 이 말랑한 살 안쪽에 내 자궁이 있다니 매번 신기하다. 이 안에 있을 아기집에 지금 안쪽부터 무너지고 있겠구나. 20일동안 정성스레 만든 아기집을 무너트리는 거라니 온몸이 평소와 다른게 이해가  법도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예민해지는건 좀 너무하지 않나.


예민해지고 싶지 않다. 짜증내고 싶지 않다.

어떤 상황에도 이성을 잃지 않는 어른이 되고자 부던히 노력했는데, 이까짓 호르몬 때문에 파충류가 되는건 너무 억울하다.


화장실을 나와 알약을 하나 더 집어 먹으면서 생각한다.

어쩌면 앞으로 있을 일주일은 나를 조금씩 더 짜증나게하고 조금씩 더 예민하게 하는 일들이 계속될꺼다. 부디 이까짓 호르몬 때문에 내가 지금보다 더 재수없는 인간이 되지 않기를, 내 일상이 조금씩만 다르고 크게 다르지 않기를.


*<뱀의 뇌에 말을 걸지 말아라>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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