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쓴이 Feb 27. 2017

벤치에 앉아서

내가 다닌 대학교는 굉장히 구조가 이상했다. 

1층 정문으로 들어갔는데 후문은 3층에 있는 둥, 보통 사람의 층간 감각을 어지럽힐만한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산이 있던 자리를 깎았던 까닭인데, 덕분에 구석구석 숨어 있는 공간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곳에는 늘 벤치가 있었다.  
대학생의 시간표는 어쩜 그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지, 죽도록 싫었던 1교시 다음에 애매하게 4교시가 걸리거나 하루는 수업이 하나도 없다가 어느 날은 5교시까지 꽉 차는 일도 있었다. 비는 시간이 길다면 차곡차곡 다른 것들을 채워 넣을 수 있었지만 애매하게 비는 시간은 어찌 보내야 할지 항상 막막했다. 

친구와 만나기도 애매하던 조각난 시간. 혼자서 그것을 채우기 위해 나는 벤치에 갔다.
한가한 곳에 있는 벤치로 가 음흉하게 몰래 누워 보기도 하고(나쁜 일은 아니었지만 왜인지 사람이 오면 화들짝 일어났다),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는 벤치에서 책을 보기도 했다. 인문관 뒤편 벤치에서는 아무도 없는 틈을 타 노래를 크게 틀어 놓고 따라 부른 적도 있었다-'너도 날 좋아할 줄은 몰랐어, 어머나.' 
어느 날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그림자를 멍하니 바라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딱히 스트레스를 푼 것도 아니고, 대단한 힐링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벤치에서 보냈던 무의미하고 무용한 시간들. 

얼마전 찾아간 학교에서 나는 그때의 나처럼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는 남자를 보았다. 그 흔한 스마트폰도 보지 않고, 정면을 향하고 있지만 딱히 뭔가를 보는 것 같지 않은 멍한 눈빛으로 남자는 무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시간들을 그리워하는 나를 발견했다. 

요즘의 나는 아침이 되면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출근을 한다. 거의 반자동으로  일어나는 일이라 내가 방금 샤워하기는 한 건지, 내가 쓴 바디워시가 예전에 쓰던건지 새로 산 건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회의를 하면서도 상대방의 말을 듣기보다는 내가 다음에 할 말을 생각하느라 머릿속은 정신없고, 구내식당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서는 습관적으로 인터넷 뉴스를 검색한다. 읽는다.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다. 

뭔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알아채지'못하고 지나가는 시간들이다. 겉으로 보아 바쁘지만 실속은 없다. 그 어느 시간에도 내가 '현재'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머릿속에는 아까 받지 못한 전화를 언제 다시 걸지, 이따가 할 보고에서 팀장님의 예상질문은 뭐가 있을지, 다음번 고객사 미팅은 어떤 주제로 할지 등등이 뒤엉켜 있다. 

그러니 나에게 무용한 시간이 필요하다. 

적어도 그때는 온전히 여기 있을 수 있으니. 들숨과 날숨도 알아챌 만큼 심심한 시간. 짧건 길건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저 현재에 존재하기만 할 뿐인 그런 시간. 과거도, 미래도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시간 말이다.


@havana, cuba, 2010


@hama, syria, 2010

매거진의 이전글 우주먼지들 화이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