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닌데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7051930561
지난밤 한 명의 슈퍼우먼이 세상에 나타났다. 새로 보훈처장으로 임명된 피우진 씨의 등장은 아마 이 나라 역사에 '유리천장'을 깬 인사 발탁의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상관의 술자리 접대 요구를 거절하고, 반항한 일, 유방암 수술 후 업무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멀쩡한 한쪽 유방을 절체한 일, 퇴역 명령에 반하는 행정소송에 승소한 일 등. 이 중 하나라도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싶은 생을 살아오신 분이다.
정면돌파.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새 보훈처장에게 경외를 보낸다. 남성이 다수를 이루고 있는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이만큼의 존엄을 지키고 살아온 그 생을 존경한다. 허나 이분의 등장은 다른 의미로 나를 무력하게 만든다.
난,
저렇게,
못하는데.
난 우리 엄마 딸로 태어나 스무 몇 해를 살았다. 늦은 밤 집에 가는 길이 무서워 종종걸음을 걷고, 술자리에서 회사 동료들이 아무 의미 없이 하는 스킨쉽-손등 만지기, 허벅지 부딪히기-에 움찔움찔 놀란다. '너는 얼굴마담이니까 내일 예쁘게 하고 와'라는 말은 일한 지 6년이 지난 지금도 칭찬인지 모욕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이런 나도 정면돌파를 한 적이 있다. 가슴 윗부분을 꾹꾹 누르는 선배에게 '하지 마세요'라고 한 그날, 다음 날 나에게 올 비난과 보복 걱정에 하룻밤 사이 퇴사와 이직을 스무 번도 더 넘게 생각했다.
난 겁 많고,
소심하고,
대범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다.
겁먹고 싶지 않다, 놀라고 싶지 않다, 화내고 싶지 않다. 조용히 자기 자리에서 내 할 일을 하며 인정받고 싶다. 허나 세상 일이 내 마음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을 어찌하리. 오늘도 나는, 대단하지 않은 내가 나를 지키면서 사는 것이 가능한 세상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