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의 어느 인디언은 각자의 생일을 스스로 정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나 '천둥처럼 빠른 발'은 12월 23일을 나의 생일로 정한다'는 식으로 부족 사람들을 모아 놓고 스스로의 생일을 공표하는 식이지요.
생일의 의미도 조금 다릅니다. 스스로 큰 깨달음을 얻어서, 혹은 이전의 인생과 이후의 인생이 많이 다를 날을 생일로 정한다고 해요. 일종의 전환점, 터닝포인트 같은 의미가 아닐까요.
온 나라가 크리스마스로, 새해로 들뜬 날입니다. 어느 순간 정신차려 보니 벌써 1년이 지나갔더군요. 이렇게 어물쩡 새해를 맞이하는건 조금 억울해서 올 한 해 나에게 터닝포인트가 될만한 일들은 무엇이 있었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12월 8일은 순례길에서 돌아온 날이군요. 앞으로 매년 12월 8일은 '첫번째 순례길에서 돌아온 날'로 지정하려 합니다.
그리고 6월 30일은 자취를 시작한 날이군요. '독립기념일'로 지정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날짜가 기억나지 않는 날들이 많아요. 9월 언제였나, 싫은 사람에게 싫은 이야기를 하고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던 날이 있었는데 날짜가 기억이 안나는군요. 2월 언젠가는 글쓰기 모임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기 시작하던 날인데 이 날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네요.
곰곰히 생각해보니 저의 1년은 기념할 만한 일들이 많았는데 문서로, 여권에 찍힌 도장으로 남은 것들은 쉽게 알 수 있지만 감정을 남긴 날은 알 길이 없군요.
'있잖아. 내가 그때 그 사람한테 화내고 나서 후련해 했던 날이 언제였지?'하고 친구들에게 물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얘기를 하다 보니까 조금 억울하네요. 알고보니 내 삶은 기념할 만한 것들이 많았는데 기억이 안나는 바람에 잃어버린 것들이 또 있을 것 같아 아쉽습니다. 이렇게 나이가 들고 시간이 지나고 점점 더 많은 것들을 까먹게 된다면 저는 '내 삶은 아무것도 남은게 없어!'하며 병소주에 새우깡을 먹으며 신세한탄을 하게 될 지도 모르지요.
안되겠어요.
불행한 노년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오늘, 12월 23일을 기념일을 정하기로 한 기념일로 지정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이나 달력이 새로 바뀌는 날보다 더 의미있는 날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