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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쓴이 Nov 11. 2017

난 네 결혼식 가기 싫어

아빠에게는 몇 가지 삶의 룰이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축의금'에 관한 것이었다. 반드시 축의금을 결혼식장에 직접 가서 주어야 한다는 원칙으로, 아빠가 직접 갈 수 없는 날에는 우리 가족들이 대신 참석해서라도 꼭 직접 축의금을 내곤 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결혼식에 축의금을 들고 가는 일이 처음부터 싫었던 건 아니었다. 내 돈이 나가는 것도 아닌 데다가 평소에는 먹기 힘든 음식들을 뷔페로 먹을 수 있으니 공짜밥 먹는 재미에 축의금 배달을 은근히 즐기기도 했었다. 하지만 계좌이체로 축의금을 보내는 게 더 이상 흉이 아니게 된 세상에 이토록 고지식한 룰이 답답해져 아빠에게 물어보았다.

"왜 축의금을 직접 줘야 한다고 생각해?"

아빠의 논리는 단순했다.
"초대를 받았으면 가야 한다."
"초대를 받지 않았으면 가지 않아야 한다"

시골에서, 한 두 다리 건너면 서로의 어제 식단까지 알 수 있는 공동체 집단에서 살아오셔서 그런지 아빠는 결혼식이 마을 잔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잔치에 초대받고서도 가지 않는 건 초대한 사람에 대한 대단한 결례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리고 초대하지 않은 잔치에 가는 건 거지(...)밖에 없다며 단순하고 명료한 논리를 보였다.

결혼이라는, 사람의 인생에 큰 변화를 주는 일에 손님으로 참석하는 일에도 예의범절이 필요하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서 결혼식이 되면 드라이클리닝 해 놓았던 옷을 꺼내 입고 어색하지만 화려한 화장을 하고 먼 길을 떠난다. 우리 아빠처럼 직접 축의금을 주는 것이 예의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손님의 도리는 이런 것이다.
그렇다면 초대하는 사람의 것은 무엇인가.

남에게 정보를 전달하기 쉬운 세상에 살고 있다.
친구들의 프로필 사진만 보아도 애인의 얼굴, 아기의 돌잔치, 최근에 갔던 여행지 - 이탈리아에 갔었구나? - 를 알 수 있다. 자신의 근황을 알리는데 큰 노력이 필요하지 않아졌기 때문인지 스스로의 결혼도 가볍게 알리는 경우가 왕왕 있다.

"(n년동안 연락 한 번 없던, 살아있는 줄도 몰랐던)ㅇㅇㅇ님이(가) 모바일 청첩장을 보냈습니다."로 시작하는 개인 톡은 언제 보아도 당황스럽다. 이건 어쩌면 양호할 수도 있다. 대리인을 써서 결혼을 '공지'하는 황당한 경우는 최근에 겪었다. 당사자도 아닌 남이 연락하는 결혼식 초대를 보면서 내가 과연 초대를 받은 건지 아리송하는 기분에 불쾌해졌다. 반대로 평소에 연락이 없던 친구라도 정성스레 초대를 하는 경우에는 되려 내가 고마워지기도 한다.

이런 거...

다들 먹고살기 바쁘다. 일상만으로도 지치는데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넉다운 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보았다.
바쁜 거, 안다.
그런데 나도 그렇거든.

나도 내 일상만으로도 힘든데 적어도 '초대받았다'는 인상은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손님의 도리가 있다면 초대하는 이의 도리는 '초대를 하는 것'이다. 초대받은 사람이 그렇다고 느낄 수 있도록.

가끔씩 받는 성의 없는 연락에서 알 수 있다.
너도 나를 '오든지 말든지' 상관없는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걸.
그렇다면 나도 너의 결혼식을 '가든지 말든지'로 생각하는 게 서로 간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에는 나를 귀하게 여기고, 내가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만 남게 되겠지만, 그게 오히려 더 행복한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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