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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쓴이 Apr 17. 2016

2. 여행은
무엇으로부터 떠나는 것인가

'여행지에서의 나'를 만난다는 것

@ Kolkata, India


어느 날 명함을 정리하다 보니 벌써 내가 가지고 있는 명함통만 6통이 넘었다. 

내가 받은 만큼 나도 명함을 드렸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내가 만났던가... 하고 까마득해졌다.

명함이 보여주는 정보는 제한적이면서 완전하다. 소속과 이름, 직함, 연락처만으로 명함의 주인이 하는 일과 위치를 알 수 있고 이 사람과 닿을 수 있는 방법까지 완전히 알려 준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명함을 교환하는 것은 서로를 탐색할 수 있는 시간을 줄임으로서 보다 효율적으로 일을 진행하기 위한 필수 요소다. 



여행을 '떠난다'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떠나는가? 모든 익숙한 것들로부터 떠난다. 

익숙한 장소, 시간, 사람, 기후, 옷차림, 나무와 풀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여행 기간이 길지 않은 여행자들은 익숙한 것으로부터 떠나왔다는 사실만으로 들뜬다. 


여행 둘째 날, 

인도 캘커타의 허름한 옥탑방에 숙소를 잡은 나는 들뜬 마음으로 마더하우스에 갔다. 마더하우스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마더 테레사 수녀님이 세운 봉사활동 단체다. 봉사활동을 다녀온 친구들이 하나같이 추천한 곳이라 나는 세계여행 첫 정착지를 인도에서 뉴델리도, 바라나시도 아닌 캘커타로 정했다. 이 곳은 봉사활동을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언제나 열려 있는 곳으로, 상시로 봉사자를 모집하는 데다 짧게는 일주일도 봉사활동을 할 수 있다. 봉사 활동하는 중간에 휴식시간이 있어 센터에 있는 봉사자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도 있기 때문에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 여행자라도 쉽게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것 같았다.


숫기 없는 나는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던 한국인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나? 난 그냥 조이라고 불러 나이는 너보다 많으니까 언니라고 하면 돼"


내 소개 후에 이어진 그녀의 대답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이름도 나이도 알려주지 않고 그냥 자기를 주르륵 소개해버리는 모습에서 뭔가를 숨기는 것 같아 불쾌하기까지 했다. 내가 대단한 걸 물어본 것도 아닌데 왜 말을 해 주지 않는 건지. 아마 그녀는 조이라는 이름도 상황에 따라 쉽게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여권에 기재된 것도 아닌 외국어 이름이야 별명 같은 것이 아닌가. 상황과 대상에 따라 자기를 마음껏 소개할 수 있다는 점이 신기했다. 


그리고 나는 진짜 여행의 의미를 깨달았다.

여행은 단순히 장소를 떠난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나'로부터 떠나온 것이다. 

집을 떠나온 순간부터 직장, 나이, 이름, 친구들, 고향 등 나를 이루고 있던 모든 것들로부터 멀어지고, 멀어진 만큼의 공간에 새로운 것들을 집어넣는다. 그 과정에서 여행자들은 '집에 두고 온 나'와 는 다른 '여행지에서의 나'를만든다. 

'집에 두곤 온 나'는 직장, 나이, 고향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처음 나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무언 중에 많은 정보를 줄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뒤에 이어지는 몇 개의 문장만으로 상대방은 나를 어떻게 대할지, 대화의 시작을 어떻게 할지를 정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는 외국인들 앞이나, 당장 내일 떠날 여행지에서 잠깐 만나는 사람들에게 '집에 두고 온 나'는 아무 소용이 없다. 이때는 '여행지에서의 나'를 보여 주어야 한다. 내가 동물원 가는걸 좋아하고 징그러운 음식 먹는걸 싫어한다는 점, 더위를 잘 못 참지만 3일 정도는 씻지 않아도 괜찮다는 점을 나의 행동과 말로 표현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어느샌가 '집에 두고 온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여행지에서의 나'가 생긴다. 


조하리의 창 Johari window이라는 개념이 있다. 


조셉 루프트 Joseph Luft와 해리 잉행Harry Ingham 두 교수가 고안해 낸 것으로 유리창 전체가 우리의 온전한 자아(자신과 타인이 보는)를 나타낸다. 

예를 들면, 위의 창에서 OPEN 된 영역은 내가 인지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남들도 인지하고 있는 영역이다. 반대로 Unknown영역은 나와 타인이 인지하지 못하지만 분명히 내 안에 존재하는 자아의 영역이다. 조와 해리는 모두가 공통으로 인식하는 OPEN 된 영역을 늘릴수록(내가 나를 더 많이 알고 내가 아는 나의 모습을 남들도 많이 알 수록) 자신에게 충실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집에 두고 온 나'가 지금까지의 OPEN영역이었다면, '여행지에서의 나'는 이 영역의 확장이다. 낯선이 들에 게 나를 지금과는 다르게 표현하고 보여주는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HIDDEN과 UNKNOWN, BLIND 영역이 줄어들게 된다. 


인도에 있는 동안 나는 내가 모험심과 호기심이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여행자들은 아무도 가지 않는 현지 오락실에 들러서 게임을 하고, 신기한 게 보이면 참지 못하고 바로 말을 걸고 물어봤다. 

반대로 내가 잘 하지 못하는 것들도 깨달았다. 봉사활동 중에 만나는 환자들에게 쉽게 정을 주지 못하고 거리를 두었고, 나쁜 마음을 먹고 나에게 접근하는 현지인들을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해 위험한 상황에 처할 뻔한 적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내가 떠나지 않았다면 절대 알지 못했을 내 모습이다.


진짜 여행은 '나'로부터 떠나와야 이뤄질 수 있다.

기술의 발달 때문에 실시간 여행사진 인증이 당연시되는 시대다. 게다가 짧은 여행 중에는 눈치 없이 울리는 업무 전화, 친구들과의 연락과 완전히 차단하기 어렵다. 다만, 그동안 나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 온 귀한 시간은 좀 더 값지게 쓰기 위해서는 잠시나마 '집에서의 나'를 놓아두고 '여행지에서의 나'를 만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때의 경험이 강렬하게 남아서, 지금도 나는 명함이 없는 나를 상상한다.

날것으로 싱싱하게 살아 있는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


봉사센터 깔리갓의 모습. 봉사자들의 휴식(좌)과 내가 일을 했던 빨래터(우) @Kolkata, India 


생일을 맞은 봉사자를 위해 노래를 불러준다 @Kolkata, India 


즐거운 출근길 @Kolkata, In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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