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기억
더러운 기억.
천둥 번개가 쾅쾅 내리치던 지난 밤,나는 한 숨도 자지 못했다. 천둥 때문에? 그렇지 천둥.
내 안에 치는 천둥.
그 남자를 알게 된 건 작년 여름이었다.
같은 회사, 영업 부서, 40대 후반, 자녀 둘이 있는 아저씨. 그 정도 스펙은 회사 안에 널리고 널려서 특별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와 그는 동료 그 이상 이하의 관계도 아니었다. 필요한 자료를 만들어 주고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기 위해 미팅을 했다. 단 둘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우리 회사가 그렇듯이 한 두 명이 할 수 있는 작은 일은 드물었기에 항상 네 다섯 명의 사람들과 함께 업무를 진행했다.
이렇게 설명하니까 나와 그 남자 사이에 무슨 대단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전혀 아니다. 나는 평균의 스펙을 가진 동료와 평균의 일을 했던 것 뿐이다.
그런데.
밤 10시가 넘어 그에게서 갑자기 메세지가 왔다. "뭐 하고 계세요?"
전부터 이상한 낌새가 있었다. 갑자기 꽃 사진을 보내지를 않나 갑자기 자녀들 사진을 보내지를 않나. 그 모든 연락을 무시하고 있던 차에 갑자기 온 연락이다. 불길하다. 불쾌하다.
"무슨 일 이신가요?" 하고 묻자 그가 답한다.
"보고 싶어서 킄"
갑자기 피가 역류하는 기분이 들었다.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목구멍이 꽉 막히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가정이 있는 40대 남자가 밤 10시에 나한테 보고 싶다고 말했다.
나와 그가 무슨 관계지? 왜 이 사람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거지?
햄버거를 먹다 바퀴벌레 반쪽을 발견했다면 이런 기분일까. 아니 더 심하게 불쾌하다. 갑자기 구역감이 든다. 자동으로 내 머리는 그와 관련된 내 기억을 헤집어 본다.
한 달 전, 그와 나를 포함해 세 명이서 저녁을 먹었다.
나는 먹고 있는 약이 있어 맥주 한 병, 그와 또 다른 동료는 각각 소주 2병을 먹었다. 1차가 끝나고 다른 동료는 집으로 가고 그가 나에게 2차를 가자고 말했다. 1차 술자리에서 부터 기분나쁘게 반 말을 했던 기억이 남아 나는 그를 가까운 커피점으로 데리고 갔고, 커피 잔을 마주보고 앉아서 그는 집요하게 나의 남자관계를 물었다. '남자친구는 있어?' '너는 왜 남자 안 만나?'하는 질문이 불편해서 뜨거운 커피를 거의 원샷했다.
커피점을 나오니 밤 9시가 조금 넘었다. 음 그래 이 정도면 괜찮지.
하고 집에 가려는데 그가 같이 택시를 타자고 한다. 나와 완전히 반대 방향에 사는 사람이 택시를 태워 준다는 말이 이상해서 따로 가겠다고 하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다. 그게 다 다.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에 온 메세지가 "보고 싶어서"
아마도 혼자서 소설을 많이 쓰셨나 보다. 그 소설 속에 나와 그가 어떤 관계였는지는 역겨워서 생각도 하기 싫었다.
빠르게 메세지를 캡쳐하고 한참을 고민했다.
뭐라고 말해야 나에게 불이익 없이 이 사람을 완벽하게 떼어 낼 수 있을까. 갑자기 억울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해코지 당할 걱정을 해야 하는건가. 잘못한 건 내가 아닌데. 오밤중에 연락한 유부남이 잘못인데.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불편합니다." 하고 메세지를 보냈다.
이런 상황에서는 빠르게 거절 의사를 밝히는게 중요하다고 어디서 본 것 같아서. 이래야 내 마음이 조금 더 편할 것 같아서.
혹시 몰라 전화가 올 때를 대비해서 자동 통화 녹음 기능을 활성화하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내일 당장 얼굴 보고 이야기해야지. 따져야지. 그 사람이 써 놓은 소설은 로맨스가 아니라 스릴러 범죄물이라고 정정 해 줘야지. 밤 새도록, 그리고 꿈 속에서도 그에게 어떻게 말할지 생각했다. 비는 계속 내리고 천둥을 계속 쳐댔다. 지난 밤을 잊을 수가 없다.
결국 첫차가 오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잠을 너무 얕게 잔 탓에 머리가 무거웠다. 어떻게 말하지,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하지, 그 사람이 발뺌하면 어떡하지, 자기는 그냥 편하게 한 말인데 내가 너무 과민반응하는거라고 오히려 나한테 역정을 내면 어떡하지. 상상만으로도 억울해서 눈물이 났다. 이제 출근인데, 울면 눈이 부어서 안되는데, 오늘은 미팅도 세 개나 있는데. 어떡하지 진짜.
집에 있던 휴대용 녹음기를 챙기고, 핸드폰의 녹음 기능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지하철을 탔다. 어떻게 말을 하지. 할 말이 있다고 메세지를 보내야 하나. 당황해서 녹음기를 들키거나 두고 가면 어떡하지
그러던 중 띠링,
그에게서 메세지가 왔다.
"불편합니다" 라고 쓴 내 글에 바로 이어서 그가 보낸 메세지
(미소) 무재칠시
(無財七施)
* 어떤 이가 석가모니를 찾아가 호소(呼訴)를 하였다.
- "저는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으니 이 무슨 이유(理由)입니까?"
- "그것은 네가 남에게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 "저는 아무 것도 없는 빈털털이입니다. 남에게 줄 것이 있어야 베풀지 않겠습니까?"
- "그렇지 않느니라. 아무 재산(財産)이 없더라도 남에게 줄 수 있는 7가지가 있는 것이다"
1. 첫째는 화안시(和顔施) - 얼굴에 화색(和色)을 띠고 부드럽고 정다운 얼굴로 남을 대하는 것으로 '미소(微笑)'를 이름이요,
2. 둘째는 언시(言施) - 말로써 남에게 얼마든지 베풀 수 있으니 사랑의 말, 칭찬(稱讚)의 말, 위로(慰勞)의 말, 격려(激勵)의 말, 양보(讓步)의 말, 부드러운 말 등이다.
3. 셋째는 심시(心施) - 마음의 문을 열고 따뜻한 마음을 주는 것이며,
4. 넷째는 안시(眼施) - 사랑을 담은 눈으로 사람을 보는 즉 눈으로 베푸는 것이고,
5. 다섯째는 신시(身施) - 몸으로 베푸는 것인데
짐을 들어준다거나 하는 것이 바로 신시이다.
6. 여섯째는 좌시(坐視) - 자리를 내주어 양보(讓步)하는 것이요,
7. 일곱째는 굳이 묻지 않고 상대의 속을 헤아려 알아서 도와주는 찰시(察施)이다.
* "네가 이 일곱가지를 몸소 행하여 습관(習慣)이 붙으면 너에게 행운(幸運)이 따르리라"
* 이것이 바로 잡보장경(雜寶藏經)이라는 불경(佛經)에 나오는 무재칠시(無財七施)이며, 가진게 없는 무재(無財)인 사람일지라도 남에게 베풀 7가지 칠시(七施)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도 당신은 좋은일만 있을겁니다.
아, 아직도 소설 쓰고 계시구나.
당장 남자에게 전화했다.
- "여보세요"
- "네 여보세요"
평안한 목소리를 들으니까 울컥이는 감정을 참을 수가 없다. 바로 본론으로
- "저한테 어제 밤 열 시에 보고싶다고 보내신 것 맞으세요?"
출근 시간, 2호선 지하철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하는걸 느낄 수 있었다.
나도 몰라 이제
- "저한테 어제 밤 열시에 보고 싶다고 보내신 것 맞으시냐구요"
목소리가 커지는 걸 주체할 수 없었다. 너무 화가 났다.
- "아..아뇨 제가 그런걸 보냈나요 한번 확인 해 보겠습니다."
남자가 당황한다.
- "기억이 안 나신다고요? 제가 어제 캡쳐 해 놨으니까 캡쳐 해 놓은 것보내 드릴까요"
- "네!? 아뇨 그.."
변명하지마
- "저한테 보고 싶다고 보내신거 사모님도 아세요?"
- "네!? 아니 그게..."
변명하지 말라고
남자의 목소리가 떨린다.
- "그리고 오늘 아침에 보낸 메세지는 뭔가요?"
- "네? 아니 그 그냥..."
입다물어 이제
- "이런 메세지 보내시는 거랑 밤 늦게 보고 싶다고 말씀하시는거 너무 불쾌하고 불편합니다. 하지 마세요.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 "네? 네 알겠습니다."
내 인생에서 꺼져
- "아시겠어요? 다시 보내지 마시라구요"
마지막 말은 거의 울면서 했다.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머리에 피가 쏠린 것 같았다. 전화를 끊고 보니 나를 보는 시선들이 다시 느껴졌다. 다들 핸드폰에 뭔가 쓰고 있네. 그래 말해라 퍼트려라. 내가 방금 발정난 유부남에게 불쾌하다고 말했다고, 불편하다고 말했다고.
지금도 이 이야기를 쓰면서 손이 떨린다.
아직도 이 이야기는 끝난 게 아니다. 어디 가서 내 뒷담화를 하고 다니지는 않을지, 회사에 왜곡된 소문이 퍼지지는 않을지 걱정된다.
억울해.
잘못한 건 내가 아니야. 잘못한건 당신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