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에는 가족들과 같이 중국에 가기로 했다.
'~로 했다.' 라는 문장을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과서에서 설명한다면 '스스로 결정한 미래의 일'이라고 할 테지만 그런 의미라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휴가는 가야겠고, 어디로 갈지 몰라 고민하고 있던 차에 다른 가족들이 중국을 간다고 해서 거기에 낀 것이다. 그러니까 이 문장을 정확하게 고친다면
'이번 여름에는 가족들의 중국 여행에 끼기로 했다.' 가 된다.
가족과의 여행은 많이 긴장되는 일이다. 건강 상태와 관심사가 다른 세 집단(아빠, 엄마, 나. 그리고 동생으로 이루어졌으나 동생은 누구에게나 잘 맞춘다)이서 4일 동안 타지에서 24시간 동안 붙어 있을 것이라는 상상만으로 긴장된다. 분명 더울 것이고, 다리는 아플 것이고, 음식은 입에 맞지 않을 것이고, 크고 작은 불편들이 있을 것이다.
고작 나흘짜리 여행에 걱정을 하다 보니 우리가 어떻게 삼십 년을 같이 살았던 것인지 의아해졌다.
심지어.
내 생애를 통틀어 헤어지지 않고 같이 산 사람은 이 사람들 밖에 없다.
이 사실이 갑자기 믿기지가 않는다. 이 사람들이 전부 다 죽어 버리면 나의 지금까지의 삶을 어디로 가는 건가. 요즘은 기술이 좋아서 예전에 홈 비디오로 촬영한 모습들 - 이빨을 빼는 나의 모습이나 막내 동생이 뒤집기를 하는 순간 - 은 남길 수 있겠지만, 그 모습을 보며 추억을 회상할 사람이 없어진다면 장면은 오히려 기괴할 따름이다.
가족을 나의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것이 매정하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혈육의 정이니 뭐니 하는 비 이성적인 단어들보다 나는 이게 더 좋다.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별한다.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니고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 사람들을 보내다 보면, 그 시간을 초월해서 늘 나의 역사에 같이 있을 사람들이 특별해지는 것이다.
그 특별한 사람들과의 여행이 고난 길이라는 건 논외지만.
키워드 '가족'으로 검색하니 오리 가족이나왔다. 예쁘다.